'속옷 사업의 대부' 남상수 남영비비안 창업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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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식 속옷 국내에 첫 보급
남상수 남영비비안 명예회장이 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남 명예회장은 1925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1957년 남영비비안을 설립해 여성 속옷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는 고쟁이나 광목으로 된 속옷을 착용하던 때였다. 서양 의복이 빠르게 확산되자 그는 서양식 여성 속옷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시장 개척에 나섰다. 브래지어, 거들 같은 속옷을 국내 처음 선보이면서 ‘비비안’이라는 브랜드를 알렸다.
국내 ‘여성 속옷 1세대’의 대표 격인 그는 해외 출장 때 여성 속옷 매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오해를 사 쫓겨나기도 했다. 쫓겨나도 그는 쇼윈도 앞에 주저앉아 새로운 속옷 디자인을 수첩에 그려 오기도 했다. 샘플로 다량의 속옷을 사올 때는 세관원들이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남 명예회장은 수출 1세대란 평가도 받는다. 1954년 무역 회사인 남영산업을 설립한 그는 미국, 유럽, 일본 등에 속옷과 스타킹을 수출했다. 1970년대 홍콩 스타킹 시장의 30%를 차지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일본 기업이 장악하고 있던 미국 시장에 연간 800만장의 브래지어를 수출했다.
그는 한국 수출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공의 날 대통령표창(1975년), 동탑(1980년), 은탑(1985년), 금탑(1992년) 산업훈장을 받았다. 1973년부터 24년 동안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으로 일했다.
1976년에는 기업의 사회적책임을 다하기 위해 재단법인 연암(然菴)장학회를 설립했다. 평소 “성장하는 청소년을 위한 교육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호인 연암을 따서 만든 이 재단법인은 경제적 이유로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순 여사와 남석우 남영비비안 회장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11일이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
남 명예회장은 1925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1957년 남영비비안을 설립해 여성 속옷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는 고쟁이나 광목으로 된 속옷을 착용하던 때였다. 서양 의복이 빠르게 확산되자 그는 서양식 여성 속옷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시장 개척에 나섰다. 브래지어, 거들 같은 속옷을 국내 처음 선보이면서 ‘비비안’이라는 브랜드를 알렸다.
국내 ‘여성 속옷 1세대’의 대표 격인 그는 해외 출장 때 여성 속옷 매장을 직접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오해를 사 쫓겨나기도 했다. 쫓겨나도 그는 쇼윈도 앞에 주저앉아 새로운 속옷 디자인을 수첩에 그려 오기도 했다. 샘플로 다량의 속옷을 사올 때는 세관원들이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남 명예회장은 수출 1세대란 평가도 받는다. 1954년 무역 회사인 남영산업을 설립한 그는 미국, 유럽, 일본 등에 속옷과 스타킹을 수출했다. 1970년대 홍콩 스타킹 시장의 30%를 차지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일본 기업이 장악하고 있던 미국 시장에 연간 800만장의 브래지어를 수출했다.
그는 한국 수출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공의 날 대통령표창(1975년), 동탑(1980년), 은탑(1985년), 금탑(1992년) 산업훈장을 받았다. 1973년부터 24년 동안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으로 일했다.
1976년에는 기업의 사회적책임을 다하기 위해 재단법인 연암(然菴)장학회를 설립했다. 평소 “성장하는 청소년을 위한 교육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호인 연암을 따서 만든 이 재단법인은 경제적 이유로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영순 여사와 남석우 남영비비안 회장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11일이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