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모 신임 한국경제학회장은 “ 대내외 여건상 통화·환율·재정정책이 모두 딜레마에 빠진 ‘정책절벽’ 상태”라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정책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구정모 신임 한국경제학회장은 “ 대내외 여건상 통화·환율·재정정책이 모두 딜레마에 빠진 ‘정책절벽’ 상태”라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정책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경제가 몇몇 업종의 선전에 따른 수출과 투자 회복 등으로 버티고 있지만, 기본 체력은 급속히 저하되고 있다. 잠재성장률은 이미 2%대 중반까지 떨어졌고, 저성장 고착화를 막기 위한 구조개혁은 흐지부지되다시피 했다. 전 세계에 퍼지는 보호무역주의 기조로 인해 불확실성까지 증폭되고 있다.

신임 한국경제학회장으로 취임한 구정모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63)는 1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성장, 소비, 투자 등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L자형’의 저성장 국면에 들어섰다”며 “현실을 받아들이고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내외 여건상 통화·환율·재정정책이 모두 딜레마에 빠진 ‘정책절벽’ 상태”라며 “단기적인 경기 부양을 위해선 추가경정예산이 적합한 카드”라고 설명했다. 최근 경기가 부진한 가운데 물가가 오르는 현상에 대해선 ‘리플레이션(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 인플레이션으로 가는 단계)’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현실 경제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겠다고 강조했다. 구 신임 회장은 “이제 한국 경제학자들이 나서 현실 경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언해야 할 때”라며 “올해 네 차례의 세미나를 통해 대선 경제 공약 검증부터 신(新)정부의 경제정책까지 점검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제 현안은 산적해 있는데 경제학자의 목소리가 안 들린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학자들도 통감하는 지적입니다. 그간 열린 학회도 ‘그들만의 세미나’에 그쳐왔지요. 지금처럼 경제 이슈가 많은 시기엔 학자들이 침묵을 깨고 경제 현안에 목소리를 내고 정책 수립 과정에서 좀 더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현실 경제의 ‘감시견’ 역할을 강화할 계획이에요.”

▷학회 차원에서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월요인터뷰] 구정모 한국경제학회장 "경제학자도 목소리 내겠다…대선 포퓰리즘 공약 감시부터 할 것"
“당장 다음달 초 첫 번째로 ‘한국 경제 위기의 본질’을 분석하는 세미나를 열 겁니다. 이어 3월 말 두 번째 세미나에선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각 대선 주자들의 경제정책 공약을 심층 분석하려 합니다. 경제학회에서 정치논리는 최대한 배제한 채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공약의 실행 가능성과 그 효과를 검증할 계획이에요. 다음 정부가 들어서 내놓는 경제정책도 그다음 세미나를 통해 검증할 거고요. 이어서 신정부 출범 후 100일에 대한 평가까지 할 예정입니다.”

▷경제학자들이 너도나도 대선 캠프에 몸담으려는 현상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바람직한 측면도 있고 아쉬운 측면도 있습니다. 정책 공약을 만들 때 경제 전문가들이 기여한다는 건 바람직한 거죠. 다만 학자들이 정치에 몸담았다가 ‘정치적 희생양’이 돼서 도태되면 한국 사회로선 큰 인력 손실입니다. 학자들은 정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조언만 하는 건전한 풍토를 마련할 필요가 있어요.”

▷한국 경제의 상황을 진단해주시지요.

“2012년부터 성장, 소비, 투자 등이 하락하는 ‘L자형’ 저성장, 만성적 침체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잠재성장률이 2%대로 하락했기 때문에 더 이상 빠른 성장은 기대할 수 없는 상태고요. 저성장 국면에 들어섰다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시적으로 3~4%대 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지만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 겁니다. 경기 과열이라는 얘기니까요.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것밖엔 답이 없습니다.”

▷저성장에 빠진 원인은 무엇입니까.

“5%대이던 잠재성장률은 2011년부터 떨어졌습니다. 이후 구조적인 요인 때문인지 경기변동적인 요인 때문인지를 놓고 2년간 논란이 첨예했습니다. 2013년이 돼서야 구조적 성장률 하락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그 2년이 참 아쉽습니다. 중요한 시기였는데 실기했죠.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기업구조조정지원법(원샷법), 노동개혁 관련 법 등을 만들면서 한국 사회도 경제 침체의 원인이 뭐고 개혁하기 위한 방향이 무엇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도 실행되지 않았죠.”

▷현재 직면한 위기 요인을 짚어주십시오.

“가장 핵심은 성장 모멘텀 상실입니다. 주력 산업의 경쟁력이 저하된 게 잠재성장률 하락의 가장 큰 요인입니다. 가계부채, 고령화, 양극화도 큰 문제죠. 새로운 성장 발판을 찾아보겠다는 정책 실험을 할 여력도 없어요. 정치에 경제가 희생된 측면이 많아요. 대외적으로는 ‘차이나 리스크’와 ‘트럼프 리스크’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습니다. 미·중 무역 마찰로 중국 성장률이 저하되거나 중국 부실금융채권이 문제를 일으키면 한국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미국 금리 인상도 변수예요. 미국 제조업이 되살아나고 있어 인상 시기가 더 빨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국내 시장에서 외국 자본 이탈로 이어져 위기 가능성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내수 침체 탈출구가 마땅치 않아 보입니다.

“한국 경제는 ‘정책절벽’ 위에 서 있습니다. 미국 금리인상이 예견돼 한국은 기준금리를 내리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트럼프가 중국 등에 대해 환율 조작국을 거론하면서 환율정책도 제약이 커졌어요. 유일하게 남은 수단이 재정 편성인데, 이 역시 논란이 많습니다. 정부도 올해 예산 편성에서 수입은 5.9% 증가하는데 지출은 3.7% 늘리기로 계획을 짰더군요. 지출 총액은 증가했지만 본격적인 재정확장정책을 쓰지는 않겠다는 겁니다. 단기적 부양이 필요하다면 꺼낼 수 있는 카드는 추경일 겁니다.”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습니다.

“물가를 견인하는 요인들은 아직 일시적이고 부분적이며 미약합니다. 해외 원자재 가격이나 유가가 급등하지 않는 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를 제기하기엔 이릅니다. 오히려 지금은 리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있을까요.

“올해 만료되는 기업소득환류세제(기업이 한 해 이익의 80% 이상을 투자, 배당, 임금 인상분 등에 사용하지 않으면 법인세로 추가 징수하는 제도)의 가중치를 이용하면 청년 고용률이 크게 늘어날 수 있습니다. 청년 신규 채용에 가중치를 늘리는 식이죠. 이렇게 해서 기업들이 연간 1조원만 신규 채용에 사용해도 2만5000여명의 일자리가 생깁니다. 30대 대기업의 지난해 채용 인원은 고작해야 몇천 명 수준입니다. 2만~3만명을 더 고용할 수 있으면 청년실업 문제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내수 진작에도 도움이 되고요.”

▷미국의 변화된 통상정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한국도 미국의 ‘환율 조작국 지정’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설사 한국은 피해간다 하더라도 중국이 조작국으로 지정되면 파장도 만만치 않을 거예요. 트럼프 경제 패키지가 기본적으로 한국에 불리합니다. 이럴 때 컨트롤타워가 부재한 게 아쉽습니다. 마윈 중국 알리바바 회장도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죠. 중국, 일본의 기업가와 관료들은 앞다퉈 미국으로 달려가 여러 가지 여건을 우호적으로 돌리려고 노력하는데 한국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손을 놓고 있어요. ”

▷대선주자들이 경쟁적으로 경제공약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소득 불평등, 청년실업 문제 등은 모두 ‘저성장 기조’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을 내놔야죠. 이런 문제의식 없이 무조건 일자리만 만들겠다는 식의 접근은 지양해야 합니다. 성장동력 확충에 기여할 방안인지, 재원조달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인기영합적인 공약은 아닌지를 중점적으로 봐야 할 겁니다.”

■ 구정모 회장은

한국경제학회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1월 창립됐다. 전후 한국 경제의 재건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자는 뜻에서 경제학자 모임을 만들었다. 이후 60년이 넘도록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조언과 이론적 배경 등을 제공해 왔다. 현재 회원은 약 4500명으로 경제·사회과학 분야 대표 학회로 성장했다.

한국경제학회는 지난달 총회를 열어 구정모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를 신임 회장으로 선출했다. 학회가 설립된 지 64년 만에 첫 지방대 교수 출신 회장이다. 구 회장은 “학회 회원 중 상당수는 지방대 교수들인데 그동안 참여가 저조했다”며 “지방 학회들과 수평적 관계로 다양한 정책 세미나를 열 예정”이라고 말했다.

△1953년 대구 출생 △1976년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1980년 미 캔자스대 경제학 석사 △1986년 미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1996년 미 스탠퍼드대 객원교수 △2005년 한국재정학회장 △2007년 한국경제연구학회장 △1988년~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2014년~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국제화위원장 △2017년~ 한국경제학회장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