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자유인이 스스로를 속박하는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이율배반적일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정한 종교는 아니었다. 4대째 가톨릭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바람에 따라 신학교에 들어갔고 또 그곳에서 14년의 세월을 보냈다. 당시 나를 사제의 길에서 그만두게 한 신부님은 후에 “자네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그래서 신부 생활을 잘할 것 같기도 하고 또 누구처럼 종교개혁을 할 것 같기도 해서 고민하다 내보냈다”고 말씀하셨다. 그 신부님의 혜안이 놀랍다. 그렇다. 내게는 하느님을 ‘할아버지’라 부르자고 제안하는 엉뚱한 기질이 있다.

내가 성직자의 길을 갔다면 나는 하느님이 얼마나 좋은 분임을 깨닫지도 못하고 보속, 극기 그리고 희생 등을 강조하며 자신을 옥죄고 살아갔을지도 모르겠다. 또는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못한 신자들에게 “회개하시오”라고 소리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속의 삶을 살면서 나는 신께서 주신 나의 생(生)이야말로 크나큰 축복임을 알았고 또한 그의 가르침의 핵심을 이해하게 됐으며, 그로 인해 세상이 밝아짐을 느낀다.

많은 이가 무신론을 주장하고,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우연히 생겨났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릴 존재가 아님을 확신시켜주며 ‘절대적 가치’를 지닌 한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나를 격려해주는 그를 믿는다. 내가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욱 인생을 값지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임을 또한 믿는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 그리고 남녀가 뒤섞여 사는 것이 바로 삶의 현장이다. 그리고 모두가 무관할 수도 있지만 자신이 믿는 신 아래에서 그들은 서로 형제고 자매며, 함께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나는 이 유구한 자연 속에서 머지않아 흙으로 돌아갈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못된 가슴에는 영생에 대한 꿈이 있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이런 희망이 헛된 욕망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고 탓하지 않겠다. 그분은 나를 소중한 인격으로 창조하셨고 내 가슴 안에 있는 영원한 삶을 꿈꾸게 하셨으며 또 이뤄줄 것을 믿는다. 이런 바보스러운 ‘자신의 인정’이 바로 신께서 나에게 베푸시는 사랑이라 생각하며 또 내가 그를 믿는 이유다.

유영희 < 유도그룹 회장 cmyu@yudohot.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