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을 열며]는 한경닷컴 유통·소비팀 세 명의 기자들이 독자에게 건네는 '쇼핑 목록'입니다. 세상은 넓고 신상품은 많지만 우리의 지갑은 얇기만 하죠. 허투루 지갑을 열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이 상품 사야 돼 말아야 돼, '지갑을 열며'가 대신 고민해 드립니다. 이제 똑똑한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소비하는 인간)로 거듭나 볼까요. [편집자주]
[고은빛의 지갑을 열며] 직접 만든 '라따뚜이' 한입 먹어본 남자친구 반응은
자취생활 5년차에 접어들자 김치볶음밥 정도는 눈 감고도 만든다. 주말마다 각종 볶음밥을 만들어 먹다 문득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요리 욕심이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건 온라인 쇼핑사이트 11번가에서 판매하는 '레시피 딜리버리 서비스'.

요리 레시피와 함께 정량에 맞춘 식재료를 쿠킹박스 형태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다. 바로 저거다. 과감히 '프랑스 가정식'에 도전해봤다.

◆ 조리시간 25분인데...재료 손질만 땀 뻘뻘

11번가의 레시피박스 코너에는 다양한 레시피 딜리버리 서비스가 입점해 있다. 어떤 메뉴를 고를지 고심하다 식스레시피의 '라따뚜이 등심'을 선택했다.

라따뚜이는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전통 요리로 호박, 피망, 토마토 등의 채소에 허브와 올리브 오일을 넣고 뭉근히 끓여 만든 스튜다.

할리우드 픽사 스튜디오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라따뚜이'로 대중들에게도 익숙하다.

라따뚜이 등심은 2인분 기준으로 2만6300원. 주문한 지 이틀만에 집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스티로폼 박스 안에는 국내산 돼지고기와 주키니 호박 반토막, 가지 1개, 토마토 2개, 미니 파프리카 3개, 마늘 4쪽, 양파 반개 등 기본 재료와 발사믹 소스, 레시피를 적은 종이 한 장이 들어있다.
레시피박스에 담겨있는 식재료와 레시피. (사진 = 고은빛 기자)
레시피박스에 담겨있는 식재료와 레시피. (사진 = 고은빛 기자)
레시피에 적혀있는 조리 난이도는 '중급', 소요 시간은 25분이다. 이쯤이야. 레시피에 나와있는 순서대로 자신있게 요리를 시작했지만 얼마 안가 난관에 부딪쳤다.

양파, 가지, 호박, 파프리카 등 갖가지 야채들을 깍둑썰기 하는 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야채를 썰어 준비하는 데에만 25분이 걸렸다.

레시피에서 말하는 요리 시간은 칼질과 요리에 능숙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레시피 딜리버리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요리 실력을 감안해 요리 시간을 계산할 필요가 있다.

깍둑썰기라는 최대 고비를 지나자 다음 단계는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썰어놓은 야채를 볶고, 돼지등심스테이크를 적당히 구워내면 끝이다. 마지막으로 미적 감각을 발휘해 그릇에 옮겨 담으면 된다.

◆ 자신만만 사진 찰칵…한입 먹고 아뿔싸

호밀빵과 라따뚜이, 스테이크를 그릇에 담고 사진 한장 찰칵. 인스타그램에 올린다면 #오늘은나도쉐프, #집에서도라따뚜이 정도로 태그를 붙일 수 있지 않을까.

[고은빛의 지갑을 열며] 직접 만든 '라따뚜이' 한입 먹어본 남자친구 반응은
하지만 섣부른 기대는 역시 금물이다. 요리를 완성한 뿌듯함은 딱 먹기 전까지였다.

야채는 덜 볶았고 돼지고기는 너무 바싹 익혔다. 라따뚜이와 곁들여 먹으니 스테이크라기보다 삼겹살집에서 먹는 돼지고기 같았다.

돼지고기 스테이크에 호밀빵과 같이 먹었는데도 라따뚜이가 너무 많이 남는다. 야채의 양과 부재료 간의 조화가 아쉽다.

이쯤되니 원래 라따뚜이가 어떤 맛인가 궁금해졌다. 서울 연남동의 한 음식점을 급히 찾았다. 라따뚜이, 당근크림 벨루떼, 수비드한 항정살을 주문했다. 가격은 1만9000원.

한 입 먹는 순간 토마토 소스 맛과 야채의 풍미가 진하게 느껴진다. 라따뚜이는 야채볶음이 아니라 야채스튜가 맞았다. '역시 전문가의 손길, 이래서 외식을 하는거지' 라는 깨달음을 얻고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간 남자친구. "그래도 난 집에서 만들어 준 게 더 맛있던데...." 이런 의리남, 이런 사랑꾼 같으니라고.

◆ 레시피박스, 과연 또 도전할 수 있을까

정량의 재료가 들어있어 요리하기 편하다는 점과 집에서도 외식하는 기분을 낼 수 있다는 점은 레시피박스의 장점이다.

다만 요리의 완성도는 기대 이하다. 적잖은 시간을 들여 만들어도 메뉴 본연의 맛을 내기란 쉽지 않다. 요리에 미숙한 사람들을 위해 레시피가 좀 더 친절해야 한다.

예컨대 야채를 몇 분 볶아야 한다거나 기호에 따라 넣으면 좋을 만한 양념을 소개하는 게 필요하다. 딜리버리 레시피는 초보자도 요리를 완성할 수 있도록 해줘야 의미가 있지 않나. 세상에는 계란 프라이조차 못 하는 사람도 있다.
[고은빛의 지갑을 열며] 직접 만든 '라따뚜이' 한입 먹어본 남자친구 반응은
고은빛 한경닷컴 기자 silverligh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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