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금만 회수하고 지긋지긋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것인가, 아니면 주가가 더 오르길 기다려 차익을 노릴 것인가. 외환보유액 등을 운용하는 국부펀드인 한국투자공사(KIC)의 투자 역량이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
KIC가 보유하고 있는 미국 투자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주식(7917만주)의 평가금액이 21일(현지시간) 종가 기준으로 투자 원금에 육박한 19억6197만달러를 기록했다. 이 주식은 KIC가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2월 메릴린치 우선주에 20억달러를 투자했다가 메릴린치가 BoA에 합병되면서 보유하게 됐다.

BoA는 지난 10년간 KIC에 부실 투자라는 ‘트라우마’를 안겨준 종목이다. 금융위기 여파로 2009년 2월 BoA 주가가 3달러대까지 폭락하면서 손실률이 90%에 달하자 역대 최악의 투자 결정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매년 국회 국정감사 때마다 지탄의 대상이 됐다. 2013년 이후 주가가 10달러대로 반등하자 KIC도 BoA 주식 매각을 검토했으나 “원금조차 못 건지고 파느냐”는 여론에 매번 없던 일이 돼 버렸다.

반전은 지난해 11월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대선에서 당선된 뒤 일어났다. 감세와 인프라 투자 확대 등 그의 경기 부양책에 대한 기대가 미국 증시 내 전반적인 투자 분위기를 끌어올리면서 ‘트럼프 랠리’가 이어졌다. 트럼프가 월가 금융규제 완화를 예고하면서 금융주도 대표적 수혜주로 떠올랐다. BoA 주가는 3개월여 만에 17달러에서 이날 현재 24.78달러로 45% 솟구쳤다.

KIC는 주가가 아직 투자 원금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BoA 주가가 27달러는 돼야 손익분기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KIC 내부 규정상 신규 투자는 투자위원회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이미 투자한 자산의 매각은 자체 판단으로 가능하다. KIC 측은 거래 규모가 상당한 데다 사안의 민감성을 고려해 별도 위원회를 열어 처리 방향을 결정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KIC의 BoA 지분은 전체의 0.7%에 불과하나 일괄 매각 시 시장에 미치는 파장이 클 수 있어 제3자 매각 등의 절차도 필요할 것으로 KIC 실무진은 보고 있다. 시장에 영향을 주지 않는 규모로 일부 매각한 뒤 향후 주가 흐름 등 시장상황을 지켜보며 추가 매각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월가에서는 투자 원금의 기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목표 주가’가 달라진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2008년 투자 당시 KIC가 산정한 장기 투자수익률과 배당을 감안해 ‘본전’을 잡을 경우 원금이 30억달러를 훌쩍 넘어서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투자 분석가들의 BoA 주가 전망은 밝다. 월가의 한 투자분석 사이트가 애널리스트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매수’가 11명, ‘수익률 시장평균 상회’가 15명, ‘보유’가 8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수익률 시장평균 하회’와 ‘매도’는 한 명도 없었다.

이달 초 무디스는 BoA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긍정적’으로 조정했다. 투기등급에서 세 단계 높은 현재의 Baa1 등급을 상향 조정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KIC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BoA 지분 매각은 단순한 투자 논리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며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1년 말 KIC가 BoA로부터 받은 배당금 1억5500만달러를 재투자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격렬한 찬반 논란이 벌어졌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