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무풍에어컨 개발팀은 에어컨 바람에 민감한 ‘극한 사용자’를 새 고객층으로 파악했다.
삼성전자의 무풍에어컨 개발팀은 에어컨 바람에 민감한 ‘극한 사용자’를 새 고객층으로 파악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선도자(first mover)가 돼야 한다. 그러나 혁신에 관한 ‘축적의 시간’이 선진국보다 짧아 글로벌 시장에서 선도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미래 시장을 이끌어 갈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 수 있을까. 생각의 도구인 ‘디자인 싱킹’에 해법이 있다.

필자는 해외에 나가면 가전제품 매장 둘러보기를 좋아한다. 매장에서 한국 제품이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자랑스럽다. 기술과 품질이 훨씬 앞서 있던 선진국 제품을 밀어내고 삼성과 LG 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에어컨도 그렇다. 20세기 초 미국 캐리어사가 최초로 상용화한 이후 미국과 일본을 거쳐 지금은 글로벌 시장에서 LG전자 제품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 에어컨에 관한 많은 특허, 원천기술이 미국 유럽 일본 그리고 LG전자에 있을 것이다. 이 시장에 진입해 선두주자들과 경쟁하려면 소비자의 필요와 수요를 미리 알아차려 제품에 반영하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에어컨 사용자나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면 대다수가 “전력 소모가 많다, 소음이 크다, 가격이 비싸다”와 같은 불만과 이에 대한 개선을 요구한다. 다른 잠재된 불만과 요구는 없을까. 디자인 싱킹에서는 사용자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얻기 위해 공감하기 단계에서 ‘극한 사용자’에게 눈을 돌려볼 것을 권한다. 극한 사용자란 대다수 사용자와는 다르게 살고 생각하고 소비하는 소수의 사람을 말한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정형화되지 않은 관점과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에어컨에 대한 다른 시각을 포착해 개발된 상품이 삼성전자 무풍에어컨이다. 개발팀은 가정용 에어컨 사용자만이 아니라 600여개 대형 호텔, 쇼핑센터, 비행기의 에어컨디셔닝, 에어컨 수리자를 만나 인터뷰하고 관찰했다. 사용자의 잠재된 욕구를 찾아내고 기술, 특허를 고려한 신상품 기획에 많은 고민을 했다. 그중에서 ‘에어컨 바람에 민감한’ 극한 사용자를 새로운 고객층으로 파악했다. 극한 사용자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에어컨 바람이 지속적으로 피부에 닿는 것이 싫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한경 BIZ School] 혁신 실마리 찾으려면 '극한 사용자'를 보라
개발팀은 ‘에어컨 바람에 민감한 사용자’를 대상으로 심층 기획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에어컨 바람에 민감한 사용자를 바람이 직접 닿지 않게 하면서 시원하게 할 수 있을까’란 문제를 정의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고, 적합한 아이디어를 디자인 싱킹 과정에 따라 피드백을 거쳐 완성품에 이르는 과정을 진행했다. 함께 아이디어를 내고 구체화하는 과정에 들어가 보자.

에어컨 바람이 피부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바람이 불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바람이 없으면 에어컨 냉방 능력이 떨어진다. 에어컨 바람을 불지 않게 할 수도, 그대로 불게 하기에도 난처한 모순의 상황이다.

이번엔 에어컨에서 바람이 나오는 방향을 다른 쪽으로 우회하도록 가이드를 붙여보면 피부에 직접 닿는 에어컨의 바람을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냉방 능력이 떨어져 전력 소모가 더 커지는 문제가 생긴다. 아이디어 도출 방향은 상반된 두 목적인 ‘피부에 민감하게 느껴지지 않게 하기’와 ‘냉방 능력 유지하기’를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브레인스토밍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만으로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다른 방법을 함께 활용하는 것이 좋다. 필자는 러시아의 창의적 문제해결 방법인 트리즈(TRIZ)를 활용해 아이디어를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방향으로 완성시키고 있다.

예컨대 에어컨 바람 불지 않기와 불기를 트리즈의 분리 원칙을 적용해 모두를 만족시키는 아이디어를 도출해 보는 것이다. 소비자는 에어컨을 켜자마자 시원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최초 10분은 에어컨 바람 세게 불기’와 ‘10분 이후에는 바람을 불지 않기(무풍)’ 같이 시간적으로 분리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자연에는 이런 모순된 목적이 모두 달성되는 곳이 더러 있다. 한여름 동굴에 들어가면 시원하다. 피부에 에어컨 바람을 쏘일 때와 같은 싫은 느낌도 없다. 바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조사에 따르면 에어컨 풍속은 초당 2m 수준이다. 동굴에는 초당 15㎝ 풍속의 약한 바람이 있다고 한다. 동굴에 바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에어컨 풍속 15분의 1 정도의 초미풍이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를 시간 분리 개념 아이디어와 결합하면 10분 동안은 기존 에어컨처럼 찬 바람이 세게 나오게 해서 빨리 시원해지기를 원하는 사용자를 만족시키고, 10분 뒤에는 동굴 속과 같이 사람들이 무풍으로 느끼는 초미풍이 나오게 하는 아이디어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냉동 공조, 에어컨 기술 전문가들과 함께 구체적인 설계, 실행 방안을 개발한다. 무풍 모드, 초미풍으로 풍속을 낮추면 에어컨 냉방 능력이 떨어지므로 풍속을 많이 낮추면서도 냉방 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기술적으로 보면 냉방 능력은 풍속과 바람이 나오는 토출 면적의 곱에 비례한다. 낮은 풍속으로 같은 냉방 능력을 내려면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면적을 아주 크게 해야 한다는 얘기다. 15분의 1로 줄어든 풍속을 보완하기 위해 에어컨 토출 면적을 15배 정도 넓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기존 에어컨은 제한적인 면적의 송풍구에서 바람이 나오는 데 비해 오디오 스피커처럼 에어컨 전체 몸통을 에어컨 송풍구로 제작하는 것으로 아이디어가 꼬리를 물며 개선돼 간다. 결국 에어컨 몸통 전체에 뚫은 10만여개의 미세한 구멍을 통해 사람에게는 무풍으로 느껴지는 초미풍을 불게 하는 새로운 타입의 에어컨이 개발됐다.

삼성의 이 가정용 무풍 에어컨은 2016년 출시됐다. 300만원이 넘는 고가임에도 20만대 이상 팔리는 히트 상품이 됐다. 디자인 싱킹 방법을 활용해 에어컨 100년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새로운 제품, 신기술이 나온 것이다.

이경원 < 한국산업기술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