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한국에선 데이터혁명 없다
한국에는 인공지능 연구자가 없다는 하소연이 들린다. 하지만 그런 연구자가 있으면 뭐하나. 인공지능 연구자가 넘쳐난들 연구할 데이터가 없고, 데이터가 있다고 해도 활용할 수 없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한국이 딱 그렇다.

엊그제 서울고등법원에서 판결이 하나 나왔다. 시민단체 활동가 6명이 개인정보 제3자 제공 내역을 공개하라며 구글과 구글코리아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사건의 자초지종은 접어두자. 주목할 부분은 개인정보에 관한 것이다.

재판에서 구글은 “다른 정보와 결합해야만 특정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이른바 ‘비식별 정보’는 ‘개인정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해당 정보만으론 특정 개인을 알 수 없어도 다른 정보와 쉽게 결합해 알아볼 수 있다면 그것도 ‘개인정보’로 본다”고 판단했다.

개인정보 고강도 규제

가뜩이나 경계 대상인 다국적 기업 구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판결이 나왔으니 통쾌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판결이 국내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판사를 탓할 건 없다. 미국과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한국의 개인정보보호법을 충실히 따랐을 뿐이니까.

이번 판결로 우스워진 것은 지난해 행정자치부, 방송통신위원회, 금융위원회, 미래창조과학부, 보건복지부, 국무조정실 등이 합동으로 내놓은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 가이드라인’이다. 법을 고칠 용기가 없었던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통해서라도 비식별 정보는 개인정보가 아닌 것으로 ‘추정’해 빅데이터 혁명을 일으켜 보자는 취지였다.

당시 시민단체 등은 비식별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환원이 불가능한 익명화 조치를 주장하며 극렬하게 반대했다(이들은 국회에 계류 중인 규제프리존법의 개인정보 비식별화도 무조건 반대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데이터의 산업적 가치도 동시에 사라지고 만다. 실제로 정부가 내놓은 가이드라인을 보면 비식별 정보를 활용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이번 판결로 비식별 정보는 개인정보가 아닌 것으로 추정한다는 의미조차 희석돼 버렸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

정부 내에서도 시민단체처럼 주장하는 곳이 한둘이 아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비식별 개념 자체를 사용하지 말라고 하고, 국가인권위원회는 금융위가 내놓은 신용정보법 개정안에 들어 있는 비식별 정보를 문제삼는다. 비식별이고 뭐고 일체의 개인정보 활용을 금지하는 게 보호요, 인권 지키기라는 식이다.

비식별 정보의 자유로운 활용을 보장하는 미국은 개인정보를 보호할 줄 몰라서, 인권을 무시해서 그런 건가. 비식별 정보라도 누군가 작심하면 다른 정보와 결합해 재식별할 수 있다는 점을 미국이 몰라서도 아닐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합당한 처벌조항을 두고 보호조치를 준수하도록 하느냐, 아니면 활용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느냐일 뿐이다. 이 차이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법과 현실이 같이 가는 것도 아니다. 엄격한 개인정보보호법을 고수하지만 개인정보는 무한 노출되는 모순된 상황이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말하면서 남의 신상정보 털기에 혈안인 건 또 어떤가. 이러니 더 혼란스럽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데이터 혁명은 틀린 것 같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 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