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음악들
겨울의 끝자락에 강원도로 자동차를 몰았다. 오랜 노동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심산으로 가족과 함께 오대산 자락을 목표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이번 여행에는 오랜만에 중학생 때처럼 또는 고등학생 때처럼 여행 중 듣고 싶은 음악을 모아서 들으며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노래를 듣는 것조차 마음을 먹어야 하다니 젊은 사십대 중반이 무색해진다. 늘 듣던 오페라 음악은 최대한 자제하고 요즘 유행하는 음악들을 찾아봤다. 인터넷 세상에는 정말로 많은 음원이 망라돼 있다. 최신 노래부터 흘러간 노래, 흘러갔는데 리메이크돼 다시 흐르는 노래 등 많기도 많다. 장르도 세분화돼 알앤비, 힙합, 발라드, 록, 트로트, 블루스…. 알다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카세트테이프에 좋아하는 곡들을 녹음해서 듣고 다녔는데 컴퓨터 세상에서는 선곡부터 망설여진다.

6박7일 동안 강원도와 전라도, 충청도를 가로지르는 여행길에 울리던 노래가 벌써 아련하다. 아홉 살 딸아이와 ‘오랜 날, 오랜 밤’이란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를 막연하게 반복하면서 어깨를 들썩인다. 막연히 따라 부르려니 가사도 희미하지만 즐거운 멜로디와 여행의 아련한 시간들이 이내 어울린다. 느끼고 즐기기 시작한 차안에서의 음악은 이내 내 아이와 여행의 추억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세상이 답답하고 각박해질수록 예술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당장 살아내기 힘든 상황이 되면 예술은 먼저 털어내야 할 호화이고 사치처럼 느껴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게 삶이 메마른 느낌을 주면 가끔은 포근하게 떠오르는 것이 예술 감상이다. 거창하게 예술이라고 하지 않아도 어릴 적 부르던 노래자락이나, 언젠가 행복해 했던 하늘의 색깔이라든가 하는 것 말이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라는 멜로디와 가사를 떠올리면 웃으며 걸었던 옛날 우리집 골목이 생각나고, 김민기의 ‘친구’라는 노래를 흥얼거리자면 고등학교 시절 알던 대학생 형이 어색하게 튕기는 클래식 기타 소리가 생각난다. 슈베르트의 가곡 ‘밤과 꿈’을 들으면 유학시절 찬바람이 쌩하던 캠퍼스의 흐린 하늘이 그리워진다. 지난 시간 함께하던 많은 멜로디와 가사들이 나의 시간들을 불러내 준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기억의 조각들에는 멜로디, 가사가 실려 있다. 누구나 음악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행복, 눈물, 아쉬움, 그리움들의 시간으로 여행을 다녀온다. 음악의 역할은 삶에서 전문적일 필요없이 우리와 함께 사치하는 것이 아니라 순기능하고 있다. 음악이 좋아야 기억할 수 있는 것인가? 좋은 음악이 기억되는 것인가? 중요하지 않지만 소중한 것. 그것이 음악인 것을, 그것이 나의 시간인 것을….

어떻게 기억한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소중했던 추억처럼 나의 선율들이 아스라하게 들려오면 참 감사하고 따뜻해진다. 지금은 비록 따뜻하지 않아도, 지금은 비록 기억할 만한 삶이 아니어도 사실은 음악이 항상 곁에서 들리고 있다. 레코드 가게에 들러 테이프를 사고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음악을 재생해 가며 녹음을 하는 정성을 쏟지 않아도, 보다 편리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눈을 들어 하늘의 색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시간을 가지면서 귀도 한 번 열어보시길. 혹시 들려오는 음악이 거기 있다면 그 지금이, 기억날 것 같지 않은 현재가, 미래의 우리에게 또 다른 아늑함을 선사해 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경재 < 오페라 연출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