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첫 대통령 파면] 경제 실망감·도덕적 권위 붕괴…"불통 정치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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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 왜 등 돌렸나
사태 수습과정도 불통의 연속
야당과 상의 없이 '책임총리 카드'
일방적 대국민담화 역풍만 불러
'촛불민심' 압박에 야당 탄핵 공세
여당마저 분열로 탄핵안 가결
사태 수습과정도 불통의 연속
야당과 상의 없이 '책임총리 카드'
일방적 대국민담화 역풍만 불러
'촛불민심' 압박에 야당 탄핵 공세
여당마저 분열로 탄핵안 가결
헌법재판소가 헌정 사상 유례없는 현직 대통령의 파면 결정을 내린 데는 국민 정서도 중요 변수로 작용했다. 탄핵 반대를 주장하는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의 목소리가 촛불집회 못지않았지만 3월 초에 이뤄진 대부분 여론조사에서 탄핵 찬성 비율은 70~80%에 달했다.
무엇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도덕적 권위가 붕괴된 게 결정적이다.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과정에서 이뤄진 권한 남용 등은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포용 없는 독주정치와 불통이 빚어낸 오만한 리더십이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냉혹한 심판을 받았다”고 진단했다. 역대 최고 청년실업률, 100만명을 돌파한 실업자 등 휘청거리는 서민 경제는 민심의 상처를 더욱 깊게 했다.
◆정치적 해결 기회 놓쳐
최순실 사건은 역대 정부의 비선실세 국정개입이나 친인척·측근비리에 비하면 그 법 위반의 정도가 훨씬 중차대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게 정치권의 진단이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들의 국정 개입 및 뇌물수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몇 차례 대국민 사과로 위기를 넘겼다.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임기 말까지 측근들의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잘못을 했지만 탄핵당할 정도는 아니다”는 견해가 적지 않았던 이유다. 박 대통령의 파면은 ‘정치탄핵’이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최씨 사태를 정치적으로 풀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야3당을 비롯해 정치권 역시 사건 초기에는 탄핵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불통의 리더십’은 민심의 분노를 불렀다. 야당과 일언반구 상의 없이 김병준 총리 카드를 불쑥 던진 게 대표적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질문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입장을 밝힌 세 차례의 대국민 담화는 성난 민심의 불에 기름을 부었다.
◆포용 없는 독주정치의 종말
‘즉각 하야(下野)’를 촉구하는 촛불집회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야당의 대응도 거칠어졌다. 당초 내각 총사퇴,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하던 야당도 하야를 외치기 시작했다. 임기를 1년여 남겨둔 레임덕 대통령에 대한 정치공세를 본격화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하야 절대 불가’로 맞서자 야3당은 탄핵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당시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은 심각한 분열상을 보였다.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 위해서는 재적의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하다. 당시 여야 의석 분포를 보면 여당인 새누리당은 128명, 야당과 무소속이 172명이었다. 여당이 똘똘 뭉쳤더라면 가결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당의 비박(비박근혜)계가 찬성표를 던졌다. 찬성표가 234표였다. 가결 정족수 200명을 훨씬 넘겼다. 야3당과 무소속 의원 모두 찬성했다 해도 여당 의원 128명 중 절반 가까이가 찬성표를 던졌다는 의미다.
친박(친박근혜)을 제외한 여당 의원 상당수가 등을 돌린 데는 촛불집회의 하야·탄핵 압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배경은 박 대통령이 여당조차 포용하지 않은 비타협적인 독주 정치 스타일에서 찾아야 한다고 정치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박근혜의 침몰’은 지난해 4·13 총선에서 예고됐다. 당시 새누리당은 야권의 분열에 기대서 180석까지 자신했다. 오만의 극치였다. 공천 살생부, 막말 파문, 유승민 의원 공천배제 등 친박과 비박계 간 공천권을 둘러싼 싸움은 보수층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결과는 여당의 참패였고, 16년 만의 여소야대 정국이었다. 총선 참패 후에도 친박과 비박의 분열은 봉합되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작년 말 탄핵 배수진을 칠 당시만 하더라도 탄핵안의 국회 통과가 어렵다고 판단했고, 여당에서 반란표가 많이 나올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불통’의 리더십 ‘부메랑’으로
국회는 세월호 참사 대응 미흡을 탄핵 사유에 포함했다. 이른바 ‘세월호 7시간 행적’ 논란은 박 대통령의 ‘불통’이 불러온 부메랑이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2014년 7월10일 국회 세월호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행적을 추궁하는 의원들의 질문에 “모른다”고 답했다. 그의 이 발언은 두고두고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 김 전 실장은 지난해 12월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특위에서도 “관저 내 사사로운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 굿, 밀회설, 성형시술 등 온갖 소문이 돌면서 국민들의 의혹을 증폭시켰다. 3개월여간 특검수사에서 이런 루머가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2014년 말 ‘정윤회 문건 파동’이 터졌다. 비선 실세로 거론된 정씨가 청와대 ‘문고리 3인방(정호성·이재만·안봉근 전 비서관)’ 등과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였다. 당시 문건 작성자인 박관천 민정수석실 행정관(경정)은 검찰조사에서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그리고 박 대통령이 3위에 불과하다”고 진술했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은 여야 지도부와의 회동에서 “찌라시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이라고 일축했다. 최순실 사태를 예고하는 조짐과 신호가 감지됐지만 박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
무엇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도덕적 권위가 붕괴된 게 결정적이다.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과정에서 이뤄진 권한 남용 등은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포용 없는 독주정치와 불통이 빚어낸 오만한 리더십이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냉혹한 심판을 받았다”고 진단했다. 역대 최고 청년실업률, 100만명을 돌파한 실업자 등 휘청거리는 서민 경제는 민심의 상처를 더욱 깊게 했다.
◆정치적 해결 기회 놓쳐
최순실 사건은 역대 정부의 비선실세 국정개입이나 친인척·측근비리에 비하면 그 법 위반의 정도가 훨씬 중차대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게 정치권의 진단이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들의 국정 개입 및 뇌물수수 사건이 발생했을 때 몇 차례 대국민 사과로 위기를 넘겼다.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임기 말까지 측근들의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잘못을 했지만 탄핵당할 정도는 아니다”는 견해가 적지 않았던 이유다. 박 대통령의 파면은 ‘정치탄핵’이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최씨 사태를 정치적으로 풀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야3당을 비롯해 정치권 역시 사건 초기에는 탄핵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불통의 리더십’은 민심의 분노를 불렀다. 야당과 일언반구 상의 없이 김병준 총리 카드를 불쑥 던진 게 대표적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질문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입장을 밝힌 세 차례의 대국민 담화는 성난 민심의 불에 기름을 부었다.
◆포용 없는 독주정치의 종말
‘즉각 하야(下野)’를 촉구하는 촛불집회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야당의 대응도 거칠어졌다. 당초 내각 총사퇴,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하던 야당도 하야를 외치기 시작했다. 임기를 1년여 남겨둔 레임덕 대통령에 대한 정치공세를 본격화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하야 절대 불가’로 맞서자 야3당은 탄핵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당시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은 심각한 분열상을 보였다.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 위해서는 재적의원 3분의 2 찬성이 필요하다. 당시 여야 의석 분포를 보면 여당인 새누리당은 128명, 야당과 무소속이 172명이었다. 여당이 똘똘 뭉쳤더라면 가결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당의 비박(비박근혜)계가 찬성표를 던졌다. 찬성표가 234표였다. 가결 정족수 200명을 훨씬 넘겼다. 야3당과 무소속 의원 모두 찬성했다 해도 여당 의원 128명 중 절반 가까이가 찬성표를 던졌다는 의미다.
친박(친박근혜)을 제외한 여당 의원 상당수가 등을 돌린 데는 촛불집회의 하야·탄핵 압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배경은 박 대통령이 여당조차 포용하지 않은 비타협적인 독주 정치 스타일에서 찾아야 한다고 정치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박근혜의 침몰’은 지난해 4·13 총선에서 예고됐다. 당시 새누리당은 야권의 분열에 기대서 180석까지 자신했다. 오만의 극치였다. 공천 살생부, 막말 파문, 유승민 의원 공천배제 등 친박과 비박계 간 공천권을 둘러싼 싸움은 보수층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결과는 여당의 참패였고, 16년 만의 여소야대 정국이었다. 총선 참패 후에도 친박과 비박의 분열은 봉합되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작년 말 탄핵 배수진을 칠 당시만 하더라도 탄핵안의 국회 통과가 어렵다고 판단했고, 여당에서 반란표가 많이 나올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불통’의 리더십 ‘부메랑’으로
국회는 세월호 참사 대응 미흡을 탄핵 사유에 포함했다. 이른바 ‘세월호 7시간 행적’ 논란은 박 대통령의 ‘불통’이 불러온 부메랑이었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2014년 7월10일 국회 세월호 국정조사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행적을 추궁하는 의원들의 질문에 “모른다”고 답했다. 그의 이 발언은 두고두고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 김 전 실장은 지난해 12월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특위에서도 “관저 내 사사로운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당일 청와대 굿, 밀회설, 성형시술 등 온갖 소문이 돌면서 국민들의 의혹을 증폭시켰다. 3개월여간 특검수사에서 이런 루머가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2014년 말 ‘정윤회 문건 파동’이 터졌다. 비선 실세로 거론된 정씨가 청와대 ‘문고리 3인방(정호성·이재만·안봉근 전 비서관)’ 등과 국정을 농단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였다. 당시 문건 작성자인 박관천 민정수석실 행정관(경정)은 검찰조사에서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그리고 박 대통령이 3위에 불과하다”고 진술했다. 며칠 뒤 박 대통령은 여야 지도부와의 회동에서 “찌라시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이라고 일축했다. 최순실 사태를 예고하는 조짐과 신호가 감지됐지만 박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