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에 - 윤제림(1960~ )

[이 아침의 시] 봄날에 윤제림(1960~ )
아파트 화단 앞 벤치에 동네 할머니 서넛이 모여앉아 유모차에 실려나온 갓난아이 하나를 어르고 있습니다. 백일이나 됐을까요, 천둥벌거숭이 하나를 빙 둘러싸고 얼럴럴 까꿍, 도리도리 짝짜꿍 난리가 났습니다. 배냇짓을 하는지 사람을 알아본다며 박수를 치고, 옹알이를 하는지 사람의 소리를 낸다며 아이들처럼 좋아합니다. 조금 전까지 한창이던 동남아 관광 얘기는 쑥 들어갔습니다. 할머니들은 지금 저 어린 나그네가 떠나온 나라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많은 모양입니다. 거기도 봄인지, 눈도 녹고 길도 좋은지. 거기까지 늙은이 걸음으로는 얼마나 걸리는지.

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문학동네) 中


봄날은 할머니도 갓난아이도 밖으로 불러내죠. 꽃나무들도 제 빛깔을 내는 봄! 할머니 서넛이 갓난아이를 어릅니다.

자세히 보니까 어르는 게 아니네요. 도리도리 짝짜꿍! 저 어린 나그네가 떠나온 나라의 말로 그곳의 세간살이를 묻고 있네요. 눈 녹아 길도 좋은지! 늙은이 걸음으로 얼마나 걸리는지! 봄날에 나들이 나온 갓난아이도 처음 만난 봄날이므로! 햇볕이 좋다고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던 모양입니다. 엄마 아빠랑 나갔던 촛불집회도 끝났다고! 봄빛이 꼭 새순 같았다고! 옹알이 크게 하는데 낮달도 웅얼웅얼하네요.

이소연 < 시인(2014 한경 신춘문예 당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