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에는 시장경제 원칙을 지키고 정치를 복원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탄핵이 인용된 지 사흘째인 12일 평온을 되찾은 서울 재동 헌재 앞.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에는 시장경제 원칙을 지키고 정치를 복원하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탄핵이 인용된 지 사흘째인 12일 평온을 되찾은 서울 재동 헌재 앞.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국정과제란 명분을 내세워 기업으로부터 출연금을 걷고, 정권 홍보성 사업에 기업을 동원하고, 정권에 밉보였다는 이유로 민간 기업 인사에 간섭하고….

이는 박근혜 정부뿐 아니라 역대 어느 정권이든 관행처럼 반복돼온 구태(舊態)다. 정부와 정치권은 아쉬울 때마다 당연한 듯 기업들을 불러냈고, ‘을(乙)’의 입장인 기업들은 마지못해 보험을 든다는 생각으로 참여해왔다. 이른바 ‘정경유착’도 이런 과정에서 형성됐다. 그 결과는 시장경제의 왜곡으로 나타나거나, 기업 자율성 침해로 인한 정상적 경영의 방해였다.

이런 관행이 결국 정치 권력에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10일 박근혜 대통령 파면의 주요 사유로 ‘기업의 재산권 및 경영 자율권 침해’를 꼽았다. 대통령의 권한을 이용해 기업에 자금을 요구하고 인사에 개입하는 관행에 대해서도 “헌법 가치 위배”라며 매섭게 비판했다. 이는 차기 권력에도 엄중한 경고다. 이제부터라도 △기업으로부터 준조세를 걷고 △정권 사업에 기업을 동원하고 △기업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낡은 관행’을 끊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억지로 내는 출연금 관행

[새로운 대한민국 한경의 제언] "준조세·정권사업 동원·경영 간섭…3대 악습 끊자"
준조세는 직접적인 세금은 아니지만 세금에 준하는 부담을 말한다. 기부금, 성금, 재단 출연금, 기금 예치금 등이 대표적이다. 대부분은 정권의 압박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내는 식이다. 1985년 전두환 정부가 아웅산 테러 유족을 돕는다는 취지로 걷어간 일해재단기금 598억원이 대표적이다. 1988년 5공화국 비리 청문회에서 정권 실세가 재단 출연을 강제했다는 기업인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박 대통령 탄핵 사유 중 하나로 꼽힌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대기업 갹출(774억원)도 대표적인 준조세다.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3년 14조322억원이었던 준조세는 2015년 16조4071억원으로 급증했다. 법인세 대비 준조세 비율도 같은 기간 32.0%에서 36.4%로 급등했다. 기업은 큰 부담감을 호소한다. 한 10대 그룹 임원은 “검찰 수사나 국세청 세무조사란 칼을 정권이 쥐고 있는데 어떻게 돈을 안 내고 버티겠느냐”고 말했다.

◆“법 테두리 넘어 민간 침해 안 돼”

정권 차원의 사업에 기업을 동원하는 관행도 더 이상 반복돼선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건설, 녹색성장 등의 사업에 대기업을 대거 참여시켰다. 7000억원대의 동반성장기금, 총 2조원대 미소금융 재원도 기업으로부터 거뒀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청년 실업률을 낮춘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기업 중심으로 880억원의 청년희망펀드를 조성했다. 창조경제의 핵심 사업인 창조경제혁신센터도 15개 대기업에 지역까지 할당해 반강제로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인사개입도 시장 자율을 침해하는 대표적인 악습이다. 박근혜 정부는 초반부터 포스코 KT 등 과거 공기업이었던 곳은 물론 사기업의 인사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이 CJ그룹 고위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특정 인사의 퇴진을 종용하거나 하나은행 본부장에 특정 인사를 추천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시장경제 지킬 지도자 뽑아야”

전문가들은 이번 헌재의 박 대통령 파면에 대해 ‘권력이 기업과 시장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데 대한 경고’로 해석했다. 권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최고권력자라 하더라도 법의 테두리를 넘어 민간영역을 침해하는 일은 헌법 위반이라는 게 이번 선고의 의미”라며 “새 지도자는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정체성을 지킬 의지가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