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경제적 자유에 대한 해석과 재해석
대통령을 파면하는 데 성공했다고 춤을 출 수는 없다. 여론이 며칠째 대통령의 승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정당한 파면이어야 한다는 죄의식일 수도 있다. 대통령은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며 양심의 자유를 선택했고 그래서 정치는 계속 시끄럽다. 8 대 0 판결도 재미있다. 전원 합의는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다수를 따르라는 반자유주의적 압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마지막까지 견해가 다른 2명에 대한 나머지 6명의 합의 압력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 헛소문이겠지.

“대통령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는 말은 상용어다. 하지만 “압도적”이라는 표현은 생소하다. 본인 혹은 타인이 다시는 그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강제하는 힘을 위하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을 파면으로 몰고간 이 역사적 사건조차 그다지 위하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걱정을 하게 된다. 대통령이 사적으로 특정 기업을 지원했다는 것이 파면의 중대 사유로 열거되는 바로 그 시간에도 증권시장에는 소위 대선주자 관련주들의 주가가 춤을 추는 그런 정치 수준이다.

부패는 그렇게 헌재를 희롱하고 있다. 그리고 구청장만 바뀌어도 사무용품 납품업자가 바뀐다는 것이 현실이다. 헌재는 “기업에 대한 개입은 오로지 입법을 통해”라고 강조했지만,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지금 한국은 더욱 그렇다. 더구나 국회에서 ‘만들어진 법’이라고 모두 정당한 것도 아니다. 너무도 부당한 억압적 경제법들이 양산되고 있고, 경제민주화를 내건 상법개정안은 더욱 그렇다.

‘위하력’에 대한 의구심도 자연스럽다. 소매치기를 사형시키는 형장에 전국의 소매치기들이 대목을 노려 몰려든다는 식이라면 대통령 파면의 ‘압도적 이익’은 금세 안갯속으로 사라진다. 경제적 자유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파면을 요구하는 정치권과, 2명에게 나머지를 따르도록 강요하는 재판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존재할까. 헌재가 기업에 대한 개입을 대통령 파면의 중대 사유로 열거하는 바로 그 시간 주무장관은 4대 그룹 경영자들을 모아놓고 또 무언가를 엄중하게 지시하는 ‘쇼’를 펼쳐 보였다. 금융당국 역시 업자들을 불러모아 개인 대출 규제를 지시하는 해프닝을 벌인 것이다. 소위 ‘압도적 효과’는 그렇게 허공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탄핵 사유에 형사법적 구체성까지는 필요 없다는 선언은 논란을 불렀지만 검찰 수사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았다는 파면 사유는 실로 창의적이다. 판사는 공소장에 없는 죄목도 종종 써넣는 모양이다. 한 번 마녀로 낙인되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마녀사냥이다. 자백하면 당연히 마녀가 되고 심한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더욱 사악한 마녀가 된다. 피소추자의 불성실에 대한 재판관들의 노여움은 대중적이기는 하지만 법적이지는 않다. 증거주의가 아닌 자백주의였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괘씸죄는 덤이다.

실명이 거론된 KD코퍼레이션이 2011년부터 이미 기아자동차에 납품하고 있던 우량 기업이었다는 ‘뒤늦게 밝혀진 사실’을 재판관들은 알았는지 모르겠다. 고영태 녹취록도 그랬다. 최순실이 재단에서 제대로 돈을 빼내지 못했기 때문에 고영태 일당이 그녀의 축출을 도모했다는 녹취록 말이다. 최순실과 정윤회를 혼동하는 듯한 기술마저 눈에 띈다. 그리고 국회 표결의 합법성은 명문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됐다.

표결의 역설을 제기한 사람은 프랑스 혁명기의 콩도르세였다. 국회가 표결한 다른 사유들은 모두 기각됐다. 오직 재단 설립과 사기업 인사 개입 등 경제적 자유 침해가 사유였다고 할 것인데 국회가 이 사유만 표결에 부쳤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대통령 파면을 통해 경제적 자유가 확고해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탄핵이 일상화되거나, 정치 보복을 제도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이는 압도적 손실일 뿐이다. 다음 대통령을 위해서라도 국회법 관련 규정들을 미리 정비해두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