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의 산업정책 읽기] '낭비'와 '버블'의 재인식
“발견으로 출발해 투기로 정점을 찍는다.” 누가 혁신경제를 이렇게 정의하면 어떻게 들릴까. 윌리엄 제인웨이가 《혁신경제로 자본주의 하기》에서 말한 혁신경제의 별난 성격이다. 한국에서 대선주자마다 들고 나온 혁신경제란 무엇인가.

혁신경제에 대한 제인웨이의 묘사가 흥미롭다. 경제의 업스트림(upstream)에 해당하는 혁신은 주로 수많은 과학적 발견 중 일부가 경제적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촉발되고, 이것이 다운스트림(downstream) 시장으로 가서 투기를 낳고 버블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역사적인 기술혁명, 산업혁명을 떠올리면 수긍이 간다. 스티븐 클레퍼가 미국의 첨단산업 형성 과정을 내밀하게 고찰한 《실험적 자본주의》를 보더라도 그렇다. 주목할 것은 제인웨이가 “혁신경제는 ‘불가피한 낭비’(이른바 ‘슘페터적 낭비’)에 대한 정부의 높은 관용을 요구한다”고 말한 대목이다. 연구개발(R&D) 투자에서 관용이 필요한 건 물론이고 버블이 터졌을 때도 시장경제가 계속 굴러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낭비’가 제로면 ‘혁신’도 제로

이쯤에서 한국 정부를 돌아보면 어떨까. 제인웨이가 말한 것과는 다른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연간 16조원의 R&D 투자를 한다는 정부는 낭비를 막겠다며 별의별 장치를 다 강구해놨다. 기획재정부가 덩치 큰 R&D사업에 세계 어디에도 없는 ‘예비 타당성(경제성, 기술성 등) 제도’를 도입한 것도 그 일환이다. R&D 수행 부처는 부처대로 실패는 곧 낭비라고 간주한다. 그 결과 연구개발 성공률은 세계 최고를 넘어 하늘을 찌를 정도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혁신은 없는가.

정치학자 제임스 스콧이 《국가처럼 보기》에서 이미 그 미스터리를 풀어놨다. 낭비가 제로면 창의성도 도전도 제로가 된다고. 혁신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오류나 실수, 그리고 낭비를 피해갈 수 없다. 예상하기 어려운 환경 변화를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버블은 ‘노’라는 규제공화국

이명박 정부가 ‘성실 실패’를, 박근혜 정부가 ‘성실 도전’을 허용한다고 했지만 뒤집어 말하면 실패나 도전을 그 자체로는 죽어도 못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혁신이 일어날 턱이 없다.

얼마 전 미래창조과학부는 올해 인공지능 R&D에 1630억원을 투입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차라리 그럴 돈이 있으면 인공지능 박사후연구원(포스트닥터) 100명에게 투자하라”는 독일의 어느 한국인 포스트닥터 주장이 더 공감을 얻는다. 창조경제를 한다는 미래부의 수준이 고작 이 정도인 것이다.

제인웨이가 ‘기술혁신의 금융적 표현’이라고 한 투기나 버블에 대한 인식은 또 어떤가. 1990년대 말 정보기술(IT) 버블 붕괴 후 한국과 미국에서 전개된 과정은 사뭇 달랐다. 미국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시장과 혁신 생태계가 자연스럽게 회복됐다. 반면 한국에서는 시장도 혁신 생태계도 왕창 망가졌다. 정부가 다시는 버블이 생기지 않도록 온갖 규제를 다 동원한 결과였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상장이든 인수합병이든 벤처의 퇴로는 여전히 마땅치 않다. 관치금융이 혁신금융을 짓누르고 있다. 정권마다 혁신경제를 외치지만 결과는 전혀 딴판이다. 대선주자들이 혁신경제가 뭔지 제대로 알기는 하는 걸까.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 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