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개봉박두 '대중경제론 시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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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꼭 50년 전인 1967년. ‘대중경제론’이 세상에 등장했다. 그때도 5월 ‘장미 대선’이 뜨거웠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주도 경제개발’에 탄력이 붙을 무렵이다. 대중경제론은 윤보선 후보를 앞세운 야당이 준비한 비장의 반격카드였다. 남미에서 막 태동해 세계를 휩쓴 종속이론의 변형이었다.
대외종속적 ‘재벌경제’에서 내수 중심 ‘대중경제’로의 전환이 골자다. 듣기는 그럴싸했지만 해법은 함량 미달이었다. 국내 자본을 총동원한 농업과 중소기업 우선투자를 주장했다. 외국 자본과 대기업이 중소기업 농민 노동자를 억압한다는 시각이었다. 외자 도입·공업제일주의 지양도 명문화했다.
닫힌 세계관…종속이론의 아류
어이없는 오판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감이 커진 농민과 소시민들이 대거 호응했다. 식자층 지지도 유별났다. ‘지적 허영심’만 비대한 변방 지식인들의 폐쇄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집단오류였다. 박정희는 ‘이 나라가 어찌 대외종속국이냐’며 따져물었고, 선거에서 이겼다.
대중경제론은 점점 세를 불려갔다. 1971년 김대중 후보가 더 정교한 대중경제론으로 출전했다. 중소기업가 지식인 농민 노동자 연대로 ‘대중민주주의’를 완성시키자는 식의 이념적 색채도 짙어졌다. 적잖은 지지를 받았지만 박정희의 3선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듬해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감행하고 중화학 공업화에 도전했다. 철권통치를 통해서라도 세계경제열차의 마지막 칸에 올라타겠다는 결기였다. 야당은 결사반대했다. 성공으로 이끌 어떠한 경제적 조건이나 국제적 비교우위도 없다고 주장했다. 변형윤 서울대 교수 등 무수한 명망가들도 ‘중화학 공업화 추진은 경제를 파멸시킬 것’이라며 ‘외채망국론’에 가세했다.
결과는 ‘한강의 기적’이었다. 세계는 개방과 시장의 질서로 빠르게 재편됐다. 한국의 위대한 세계사적 기여였다. 이후 대중경제론은 비주류 자리로 물러났다. 대중경제론의 저작권자 격인 김대중 전 대통령조차 집권 후 대중경제론의 해법을 외면했다.
금도 넘은 대선판 구호들
주류가 아니라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무언가 계기를 만나면 시대를 불문하고 총궐기하는 전투력을 과시한다. 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인천공항 건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이슈가 터질 때마다 비상식적 반대투쟁이 격렬했던 배경이다. 때로는 절반 이상의 발언권도 확보한다. 종속이론 등의 세례를 받은 ‘386 참모’들에 둘러싸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시장·반기업 정책을 밀어붙였다. ‘서민과 약자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글로벌 호황기였음에도 ‘나홀로 부진’을 보이며 경제성장률은 처음으로 세계 평균을 밑돌았다. 불평등지수도 크게 악화됐다. ‘부자를 벌하겠다’며 도입한 정책은 강남 아파트 값만 두세 배로 밀어올렸다.
노무현 정부 실패로 대중경제론은 역사의 박물관에 유폐됐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탄핵으로 ‘장미 대선’이 달아오르며 ‘시즌 2’가 예고되고 있다. 이름표는 대중경제론에서 ‘경제민주화’로 바뀌었다. 하지만 반개방 반경쟁 반기업이라는 본질은 똑같다. 광장을 뒷배로 뒀다는 생각에서인지 이제 체면치레나 금도도 없다. 공무원에 철밥통을 약속하고, 귀족노조와 구조조정을 상의하겠다고 대놓고 말한다. ‘재벌 해체’ 같은 서슬 퍼런 언사마저 거침없다. 50년 묵은 대중경제론의 ‘21세기 버전’은 너무 살풍경하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대외종속적 ‘재벌경제’에서 내수 중심 ‘대중경제’로의 전환이 골자다. 듣기는 그럴싸했지만 해법은 함량 미달이었다. 국내 자본을 총동원한 농업과 중소기업 우선투자를 주장했다. 외국 자본과 대기업이 중소기업 농민 노동자를 억압한다는 시각이었다. 외자 도입·공업제일주의 지양도 명문화했다.
닫힌 세계관…종속이론의 아류
어이없는 오판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감이 커진 농민과 소시민들이 대거 호응했다. 식자층 지지도 유별났다. ‘지적 허영심’만 비대한 변방 지식인들의 폐쇄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집단오류였다. 박정희는 ‘이 나라가 어찌 대외종속국이냐’며 따져물었고, 선거에서 이겼다.
대중경제론은 점점 세를 불려갔다. 1971년 김대중 후보가 더 정교한 대중경제론으로 출전했다. 중소기업가 지식인 농민 노동자 연대로 ‘대중민주주의’를 완성시키자는 식의 이념적 색채도 짙어졌다. 적잖은 지지를 받았지만 박정희의 3선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듬해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감행하고 중화학 공업화에 도전했다. 철권통치를 통해서라도 세계경제열차의 마지막 칸에 올라타겠다는 결기였다. 야당은 결사반대했다. 성공으로 이끌 어떠한 경제적 조건이나 국제적 비교우위도 없다고 주장했다. 변형윤 서울대 교수 등 무수한 명망가들도 ‘중화학 공업화 추진은 경제를 파멸시킬 것’이라며 ‘외채망국론’에 가세했다.
결과는 ‘한강의 기적’이었다. 세계는 개방과 시장의 질서로 빠르게 재편됐다. 한국의 위대한 세계사적 기여였다. 이후 대중경제론은 비주류 자리로 물러났다. 대중경제론의 저작권자 격인 김대중 전 대통령조차 집권 후 대중경제론의 해법을 외면했다.
금도 넘은 대선판 구호들
주류가 아니라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무언가 계기를 만나면 시대를 불문하고 총궐기하는 전투력을 과시한다. 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인천공항 건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이슈가 터질 때마다 비상식적 반대투쟁이 격렬했던 배경이다. 때로는 절반 이상의 발언권도 확보한다. 종속이론 등의 세례를 받은 ‘386 참모’들에 둘러싸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반시장·반기업 정책을 밀어붙였다. ‘서민과 약자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웠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글로벌 호황기였음에도 ‘나홀로 부진’을 보이며 경제성장률은 처음으로 세계 평균을 밑돌았다. 불평등지수도 크게 악화됐다. ‘부자를 벌하겠다’며 도입한 정책은 강남 아파트 값만 두세 배로 밀어올렸다.
노무현 정부 실패로 대중경제론은 역사의 박물관에 유폐됐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탄핵으로 ‘장미 대선’이 달아오르며 ‘시즌 2’가 예고되고 있다. 이름표는 대중경제론에서 ‘경제민주화’로 바뀌었다. 하지만 반개방 반경쟁 반기업이라는 본질은 똑같다. 광장을 뒷배로 뒀다는 생각에서인지 이제 체면치레나 금도도 없다. 공무원에 철밥통을 약속하고, 귀족노조와 구조조정을 상의하겠다고 대놓고 말한다. ‘재벌 해체’ 같은 서슬 퍼런 언사마저 거침없다. 50년 묵은 대중경제론의 ‘21세기 버전’은 너무 살풍경하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