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방글라데시에서 라나플라자라는 상업용 건물이 무너져 1135명이 사망했다. 이 건물에 입주한 업체는 다국적기업에 의류를 납품하고 있었다. 이 사고에 대해 다국적기업에 책임이 있을까? 건물 붕괴사고는 해당국의 안전 관리감독 부실에 주원인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규범에 따르면 다국적기업은 현지 납품업체의 작업장 안전에도 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처럼 현지 법령 위반이 아니어도 다국적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국제논의 흐름이다. 네슬레, 버거킹이 인도네시아 팜유 가공업체가 열대우림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구매계약을 취소한 것도 이런 까닭이다.

다국적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규율하려는 취지로 1976년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이 제정됐다. 당시 이들 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토대로 개발도상국에서 환경오염, 아동노동, 세금회피 등을 자행하는 사례가 빈번했고 심지어 쿠데타 세력을 지원해 국가 내란사태에 개입했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다국적기업의 부정적 영향과 사회적 반감을 줄이려는 배경하에 제정된 이 가이드라인은 인권, 환경, 조세, 뇌물 등 각 분야의 기업 준수사항을 열거하고 있다. 현재 46개국이 참여하고 있으며 의무 준수를 독려하고 이의를 중재·조정하는 기구로 국가연락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2011년 가이드라인이 대폭 개정되면서 다국적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더 포괄적으로 규정한 ‘기업책임경영’이 강조되고 있다.

기업책임경영 준수사항에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국제규범상 지킬 의무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사회공헌 같은 윤리적 차원의 ‘사회적 책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이런 국제규범상 준수사항을 국내법이나 국가 간 투자협정에 반영하는 움직임도 늘어나고 있다. 미국은 도드·프랭크법에 해외 하도급업체 인권조항을 포함시켰고, 유럽연합(EU)은 분쟁지역에서의 광물조달을 규제하는 법령을 입안 중이다. 기업이 사회적 해악을 막기 위해 선량한 관리자로서 주의를 다해야 한다는 실사 의무도 가이드라인에 추가됐다.

서구 선진국에서 기업책임경영은 국내 문제라기보다 자국 기업의 해외활동과 관련된다. 기업이 해외에 진출할 때 법제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개도국 현실을 남용하지 말라는 차원이다. 우리에게는 기업 해외활동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참고할 부분이 있어 보인다. 그간의 발전과정에서 기업은 일자리, 세금 등 개인과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지만 이익추구에 몰두하다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 많아지면서 반(反)기업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동반성장, 상생협력 등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합리성보다 국민정서적 당위성을 앞세우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도 커지고 있다.

기업활동의 자유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원칙이 한국 사회에서 명확하게 정립된 것 같지는 않다. 기업이 국가사회에 기여한다고 경영상 자유를 무한정 용인할 수는 없다. 법 테두리 밖에 있어도 사회적 해악이 큰 행위에 대한 책임이 면탈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책임 기준은 법령으로 사전에 명확히 정해야 한다. 기업이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여 과도한 책임을 부과하는 것도 옳지 않다. 윤리적 의무를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근거 없이 사적 자치영역을 침범하는 규제는 부메랑이 돼 우리 발목을 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범위를 규율하는 데 기업책임경영 논의는 좋은 준거가 된다. 정부는 기업책임경영에 대한 국내 인식을 높이고 법제화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책임성·투명성이 미흡한 것으로 평가된 국가연락사무소는 기능을 정상화해야 한다. 기업은 사회적 해악이 예상되는 행위를 자제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절제와 배려, 자유에 걸맞은 책임이 꼭 필요하다.

윤종원 < 주 OECD 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