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패배(敗北)의 나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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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 시인 >
50년이 지나간 대학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쩌다 전화번호를 알았다는 것이다. “너는 성공했고…” 라는 말로 시작됐다. 성공? 그것이 가령 성공이라면 그 성공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 친구는 과연 상상이나 할까? 나는 나에게 물었다. 성공의 반대말은 패배다. 우리는 너무 성공과 패배, 그 두 가지로 모든 생을 판가름한다. 왜 두 가지밖에 모르는 걸까.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 청군과 백군으로 갈라놓은 습관의 지속성 때문은 아닐까. 성공 과정이 있다면 패배 과정도 있다. 인간의 올바른 자질을 높이는 일은 성공의 과정도 알고 패배의 과정도 알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성공은 그다음부터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한쪽으로만 기운다. 반대쪽을 이해하면 내 쪽도 이해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너무 양쪽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한쪽이라도 당당히 가지고 있다면 아주 나쁜 일은 아니다.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더 문제인지 모른다. 나는 초등학교 때 늘 청군이었다. 두 손바닥이 다 달아날 정도로 두 손을 쳤다. “청군 이겨라 청군 이겨라.” 손바닥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입도 달아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과연 어느 쪽이 나의 청군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내 편이 존재할 때 가능하다. 계산법이 아니라 진정한 내 편이 삶에서도 필요하지만 사회에서도 필요하다. 당당히 어느 편이 돼서 그 결정부터 만족스럽고 자부심이 서는 그런 내 편이 과연 존재할까 아쉽기도 하다.
한때는 내 인생의 사회적 청군이 없어 허전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와 가족과 사회와 나라가 건전하고 발전적으로 가는 길이 내 정신의 가운데 자리 잡고 있겠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바로 혼란이다. 이런 혼란에서 청군도 백군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저기 안개 머무는 쪽으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성공이 오고 있을 수도 있다.
모두들 너무 떠들기만 하는 것 같다. 진리가 아니라 소음같이 귀를 때리는 불쾌감도 있다. 위대한 사상은 위대한 행동처럼 나팔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인간적인 면모에서 인간은 오해의 둑을 허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실패를 응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실패의 미덕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도 삶에서의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실패의 두 발에 밟히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실패를 희망으로 바꾸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는 것이다. 희망은 인간의 토지 같아서 해마다 수익이 올라가 결코 다 써 버릴 수 없는 확실한 재산이 될 것이다. 인생을 시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생이란 이겨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면 실패의 미덕을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패의 창조력은 좋은 수업이 될 것이다. 실패를 통해 배우는 자연적인 순환을 창피와 죄책감과 분노로 바꾸어 놓은 사회 속에서는 그늘과 어둠의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실패란 재탄생의 기회를 주는 특별한 교훈이며 소중한 경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이기는 힘이 아니라 지는 힘으로 성장의 속도가 빠르며 긴장을 손아귀에 쥐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힘은 나무 수액과 같다. 그것은 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신달자 < 시인 >
그런데 우리는 너무 한쪽으로만 기운다. 반대쪽을 이해하면 내 쪽도 이해받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너무 양쪽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한쪽이라도 당당히 가지고 있다면 아주 나쁜 일은 아니다.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게 더 문제인지 모른다. 나는 초등학교 때 늘 청군이었다. 두 손바닥이 다 달아날 정도로 두 손을 쳤다. “청군 이겨라 청군 이겨라.” 손바닥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입도 달아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과연 어느 쪽이 나의 청군일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내 편이 존재할 때 가능하다. 계산법이 아니라 진정한 내 편이 삶에서도 필요하지만 사회에서도 필요하다. 당당히 어느 편이 돼서 그 결정부터 만족스럽고 자부심이 서는 그런 내 편이 과연 존재할까 아쉽기도 하다.
한때는 내 인생의 사회적 청군이 없어 허전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와 가족과 사회와 나라가 건전하고 발전적으로 가는 길이 내 정신의 가운데 자리 잡고 있겠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바로 혼란이다. 이런 혼란에서 청군도 백군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면 저기 안개 머무는 쪽으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성공이 오고 있을 수도 있다.
모두들 너무 떠들기만 하는 것 같다. 진리가 아니라 소음같이 귀를 때리는 불쾌감도 있다. 위대한 사상은 위대한 행동처럼 나팔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참으로 인간적인 면모에서 인간은 오해의 둑을 허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실패를 응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실패의 미덕에 대해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도 삶에서의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실패의 두 발에 밟히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실패를 희망으로 바꾸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는 것이다. 희망은 인간의 토지 같아서 해마다 수익이 올라가 결코 다 써 버릴 수 없는 확실한 재산이 될 것이다. 인생을 시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생이란 이겨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면 실패의 미덕을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패의 창조력은 좋은 수업이 될 것이다. 실패를 통해 배우는 자연적인 순환을 창피와 죄책감과 분노로 바꾸어 놓은 사회 속에서는 그늘과 어둠의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실패란 재탄생의 기회를 주는 특별한 교훈이며 소중한 경험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이기는 힘이 아니라 지는 힘으로 성장의 속도가 빠르며 긴장을 손아귀에 쥐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힘은 나무 수액과 같다. 그것은 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신달자 <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