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Y 교수의 종말론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사회든 국가든 망하거나 죽고 있다는 생각은 거의 모든 사회과학적 예측, 심지어는 자연과학적 예측에조차 그 한계를 설정한다. 자본주의가 곧 망한다는 그럴듯한 주장은 좌익적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세적 정체성(단순재생산 경제와 그 결과인 제로 성장)이 지배하는 체제에서는 소위 과학적으로 예측되는 종말론 같은 것이 파고들 여지가 없다. 앞날을 예측한다는 것, 그것도 과학적 방법으로 미래를 말한다는 것은 실로 근대적인 주제다.

1970년대 기독교 좌익 그룹으로 활동하던 Y 좌경화 교수의 ‘종말론’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Y는 전국의 교회를 찾아다니며 대한민국 경제는 2, 3년 안에 완전히 망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외채가 너무 많고 미국의 하청 생산기지에 불과한, 소위 주변부 자본주의의 필연적 운명이라는 것이다. 어느 날 경북 안동의 모 교회에서 비슷한 요지의 강의를 베풀었는데 청중 가운데 한 명이 일어나 “당신은 3년 전에도 비슷하게 예언했는데 아직 우리 경제는 건재하지 않으냐”고 반박했다고 한다. Y로서는 위기의 순간이라고 할 만했는데 순간 놀라운 기지가 발휘됐다. “아니, 여러분은 예수 재림을 2000년이나 기다렸는데, 그까짓 2, 3년을 가지고 그러세요.” “…?” 아쉽게도 청중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다. 다만, 이 Y교수는 나라 경제가 망할 것이라고 설파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경기 양평에 상당한 규모의 땅을 착착 사 모았다고 한다. 유명한 반미 교수의 자제가 서둘러 미국 시민이 되는 것과 정확하게 같다. 대체 이들은 왜 그럴까.

기업들의 3월 중 체감경기가 석 달째 올라 79를 기록했다는 지난주 뉴스는 대선 정국에 파묻혀 관심조차 끌지 못했다. 대선 정국에서 경제 문제는 화젯거리조차 아니라는 실로 이상한 정치가 이어지고 있다. 호각지세를 형성한 문재인, 안철수 두 후보 모두 경제에는 관심도 지식도 없다는 것이 첫째 이유일 것이다. 퍼주기 복지와 갑작스런 보수 코스프레 외에는 달리 할 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좌경적 경제관이 판세를 지배하고 있다는 점도 이유가 될 것이다. 유력 후보 모두가 좌경적 경제관에 기반해 있는 터여서 굳이 이견이나 다퉈야 할 논점이랄 것도 없다. 보수진영의 홍준표 후보가 오히려 공세적이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지만 아직은 양강 판세를 파고들면서 자신의 이슈를 세우지 못하고 있다. 경제에 대해서는 비교적 좋은 뉴스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역시 가장 큰 요인이다.

한국은행 발표에 따르면 작년 한국의 성장률은 2.8%였다. 꽤 좋은 성적표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7%를 크게 웃돌았다. 특히 4분기는 0.5%의 깜짝 성장을 만들어 냈다. 모두가 제로 성장을 예고했고 급격한 하강국면에 있다는 발작적 경고가 울려 퍼진 데 비하면 서프라이즈다. 김영란법 우려도 과장으로 드러났다. 소위 ‘만들어진 비관론’이 지난 수개월 동안 언론을 도배질했다. 최순실 사건도 경제 예측도 ‘사회적으로 재구성됐다(만들어졌다)’. 비관론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외환위기급 파국론까지 등장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은 4분기 마이너스 0.4% 후퇴를 경고했고 LG경제연구원 등도 급랭론에 가세했다. 급기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4분기도 다 끝나갈 즈음인 12월7일에 4분기 성장률 0%를 예고했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틀렸다. 박근혜 경제는 그렇게 살아났다. 그러나 아무도 엉터리 전망에 대해 시인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KDI의 빗나간 전망은 더구나 부끄럽고 치명적이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망한다는 좌익은 물론이고, 좌익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우익도 경제위기를 히스테리로 몰아갔다. 진영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엉터리 정치 전망들이었다. 정치 과잉이 만들어낸 저(低)지력 사회 증후군이라고 할 만한 작은 사건이었던 셈이다. 한국 사회의 지적 풍토에서는 누구라도 이렇게 당파적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종말론의 Y교수가 작고한 지도 벌써 25년이 지났다. 그놈의 종말은 언제쯤 올지 알 수 없다.

정규재 논설고문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