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종의 '중국 인문기행' (18) 지린(吉林)] 독한 싸움기질 배태한 이민자들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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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
앞에서 소개한 랴오닝(遼寧), 뒤에서 소개할 헤이룽장(黑龍江)과 함께 지린(吉林)은 요즘 중국인들이 보통 ‘동북(東北) 3성(省)’으로 적는다. 우리의 중국 내 동포, 이른바 조선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땅이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청(淸)나라를 일으킨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누르하치가 태어난 땅이고, 더 올라가면 발해와 고구려, 부여와 고조선의 짙은 그림자가 어른거린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역사적 상상력을 부추기는 지역이다. ‘각 지역 주민 중 누가 제일 싸움을 잘할까’를 두고 2년여 전에 중국에 큰 화제가 번진 적이 있다. 범죄 통계를 따져서 낸 결과인데, 마카오와 산시(陝西) 등이 수위를 차지해 네티즌들이 뜨겁게 반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중국 지역 인문에서 ‘싸움’을 말할 때 결코 피해가기 어려웠던 곳이 바로 이 동북, 옛 개념으로는 만주 지역이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간다”
“땅에 벽돌이 놓여 있으면 동북 사람들은 결코 나무때기를 집지 않는다” “바닥에 철근 막대기가 있으면 결코 돌멩이를 들지 않는다” 등의 말이 유행했다. 사람과 시비가 벌어졌을 때 동북 사람들이 상대를 가격하기 위해 집어드는 ‘무기’를 표현한 말이다. “세 마디까지 이어지기 전에 먼저 주먹이 나간다”는 얘기는 동북 사람들의 성정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실제 도로를 주행하던 차가 신호등에 걸려 멈췄을 때 시비를 벌이던 차량의 운전자가 바로 문을 열고 튀어나와 주먹질로 엉키는 곳이 또한 이 동북 지역이다.
중국 남방 사람들의 싸움 스타일과 큰 차이가 있다. 남부 지역 중국인들의 싸움 스타일을 이야기하면서는 “아침에 출근할 때 시비를 다투던 사람 둘이 저녁 퇴근 무렵에도 여전히 말로 싸움을 벌이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이 유행한 적이 있다. 말로 시작해 말로 끝내는 방식이다.
그에 비해 동북 지역의 싸움 스타일은 맹렬하다. 그러나 같은 동북 지역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 특히 앞서 소개한 랴오닝 사람들은 비교적 약다. 말수가 제법 많고 꾀가 풍부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래서 랴오닝 사람들은 ‘동북 지역의 강남 주민’이라는 평이다. 현대 공업시설이 먼저 들어서 경제가 발달하고 남쪽 지역과 인접해 인적 교류가 다양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에 비해 이 지린 지역 주민들은 뻣뻣하다. 때로는 “촌스럽다”는 평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 점은 헤이룽장도 마찬가지다. 투박하면서도 뻣뻣하지만, 나름대로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끈질긴 감투(敢鬪)정신이 이 지역의 특성이다. 이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던 ‘이민(移民)사회로서의 특징’이랄 수 있다.
19세기 말 이민자 몰려들어
이곳 만주는 원래 청나라 황실이 제 발상지(發祥地)라고 해서 200여년 동안 타지의 주민들 출입을 막았던 곳이다. 그러나 청나라 국력이 약해지던 19세기 말에 출입금지의 봉금(封禁)을 풀면서 마침 거대한 가뭄과 흉년에 시달리던 중국 이민자들이 몰려든 땅이다. 당시의 이민으로 적어도 3000만명이 이동했다는 통계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낙동강 범람 등으로 한반도 이민도 아주 많이 몰려든 곳이기도 하다. 그런 다양한 이민들로 이뤄진 사회에서 싸움이 번지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이들의 맹렬한 싸움 기질은 바로 이런 인문적 환경에서 비롯했다고 봐야 한다.
인구는 2014년 현재 2750여만명으로 동북 3성 중에는 가장 적다. 동북쪽으로는 러시아 연해주와 접점을 형성했다. 한반도와는 압록강과 두만강, 민족의 명산인 백두산이 들어 있는 길이 1206㎞의 경계선을 형성했다. 아울러 옛 고구려의 영토였고, 중국 내 동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정서적으로 매우 가깝게 여겨진다.
‘싸움질’로 얘기를 꺼내 어리둥절할지 모르겠으나, 중국의 웬만한 땅은 대개 전쟁과 재난을 피해 살아남고자 한 사람들의 질기고 모진 싸움과 관련이 있다. 중국 동북 지역은 최근에 그런 이민 대열이 정착한 곳이다. 북한이 도발할 때, 그래서 전운(戰雲)이 짙어질 때 사람들이 북한의 대량 난민 대열을 떠올리며 먼저 시선을 두는 곳도 바로 이 지린이다.
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청(淸)나라를 일으킨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누르하치가 태어난 땅이고, 더 올라가면 발해와 고구려, 부여와 고조선의 짙은 그림자가 어른거린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역사적 상상력을 부추기는 지역이다. ‘각 지역 주민 중 누가 제일 싸움을 잘할까’를 두고 2년여 전에 중국에 큰 화제가 번진 적이 있다. 범죄 통계를 따져서 낸 결과인데, 마카오와 산시(陝西) 등이 수위를 차지해 네티즌들이 뜨겁게 반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중국 지역 인문에서 ‘싸움’을 말할 때 결코 피해가기 어려웠던 곳이 바로 이 동북, 옛 개념으로는 만주 지역이었다.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간다”
“땅에 벽돌이 놓여 있으면 동북 사람들은 결코 나무때기를 집지 않는다” “바닥에 철근 막대기가 있으면 결코 돌멩이를 들지 않는다” 등의 말이 유행했다. 사람과 시비가 벌어졌을 때 동북 사람들이 상대를 가격하기 위해 집어드는 ‘무기’를 표현한 말이다. “세 마디까지 이어지기 전에 먼저 주먹이 나간다”는 얘기는 동북 사람들의 성정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실제 도로를 주행하던 차가 신호등에 걸려 멈췄을 때 시비를 벌이던 차량의 운전자가 바로 문을 열고 튀어나와 주먹질로 엉키는 곳이 또한 이 동북 지역이다.
중국 남방 사람들의 싸움 스타일과 큰 차이가 있다. 남부 지역 중국인들의 싸움 스타일을 이야기하면서는 “아침에 출근할 때 시비를 다투던 사람 둘이 저녁 퇴근 무렵에도 여전히 말로 싸움을 벌이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이 유행한 적이 있다. 말로 시작해 말로 끝내는 방식이다.
그에 비해 동북 지역의 싸움 스타일은 맹렬하다. 그러나 같은 동북 지역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 특히 앞서 소개한 랴오닝 사람들은 비교적 약다. 말수가 제법 많고 꾀가 풍부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래서 랴오닝 사람들은 ‘동북 지역의 강남 주민’이라는 평이다. 현대 공업시설이 먼저 들어서 경제가 발달하고 남쪽 지역과 인접해 인적 교류가 다양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그에 비해 이 지린 지역 주민들은 뻣뻣하다. 때로는 “촌스럽다”는 평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 점은 헤이룽장도 마찬가지다. 투박하면서도 뻣뻣하지만, 나름대로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끈질긴 감투(敢鬪)정신이 이 지역의 특성이다. 이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적이 있던 ‘이민(移民)사회로서의 특징’이랄 수 있다.
19세기 말 이민자 몰려들어
이곳 만주는 원래 청나라 황실이 제 발상지(發祥地)라고 해서 200여년 동안 타지의 주민들 출입을 막았던 곳이다. 그러나 청나라 국력이 약해지던 19세기 말에 출입금지의 봉금(封禁)을 풀면서 마침 거대한 가뭄과 흉년에 시달리던 중국 이민자들이 몰려든 땅이다. 당시의 이민으로 적어도 3000만명이 이동했다는 통계가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낙동강 범람 등으로 한반도 이민도 아주 많이 몰려든 곳이기도 하다. 그런 다양한 이민들로 이뤄진 사회에서 싸움이 번지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이들의 맹렬한 싸움 기질은 바로 이런 인문적 환경에서 비롯했다고 봐야 한다.
인구는 2014년 현재 2750여만명으로 동북 3성 중에는 가장 적다. 동북쪽으로는 러시아 연해주와 접점을 형성했다. 한반도와는 압록강과 두만강, 민족의 명산인 백두산이 들어 있는 길이 1206㎞의 경계선을 형성했다. 아울러 옛 고구려의 영토였고, 중국 내 동포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정서적으로 매우 가깝게 여겨진다.
‘싸움질’로 얘기를 꺼내 어리둥절할지 모르겠으나, 중국의 웬만한 땅은 대개 전쟁과 재난을 피해 살아남고자 한 사람들의 질기고 모진 싸움과 관련이 있다. 중국 동북 지역은 최근에 그런 이민 대열이 정착한 곳이다. 북한이 도발할 때, 그래서 전운(戰雲)이 짙어질 때 사람들이 북한의 대량 난민 대열을 떠올리며 먼저 시선을 두는 곳도 바로 이 지린이다.
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