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수월경화’를 연습 중인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박슬기(오른쪽).
‘허난설헌 수월경화’를 연습 중인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박슬기(오른쪽).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댔구나/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조선 중기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다. 국립발레단 솔리스트(독무를 추는 무용수) 강효형(29)은 5년 전 한 인문학 서적을 읽다 우연히 이 시를 발견하고 ‘붉게 떨어지는 부용꽃잎’ 이미지에 홀린 듯 빠져들었다. ‘언젠가 이 시를 소재로 춤을 만들겠다’고 생각하고 노트에 옮겨적어 두었다.

기회는 금세 찾아왔다. 강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이 지난해 5월 그에게 창작품을 무대에 올려보자는 제안을 했다. 강효형은 2015년 선보인 창작 소품 ‘요동치다’로 높은 평가를 받아 차세대 안무가로 주목받고 있었다.

그는 곧장 허난설헌의 시를 떠올렸다. ‘몽유광상산’ ‘감우(感遇)’ 두 시와 허난설헌의 삶을 몸의 언어로 써내려갔다. 그렇게 만든 작품 ‘허난설헌 수월경화(水月鏡花)’를 다음달 5~7일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린다. 그가 소품이 아닌 전막(55분)을 안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공연일이 가까워질수록 한편 설레면서도 걱정이 커집니다. 춤이 안무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안무가 자신도 한 명의 관객이 됩니다. 관객인 제가 만족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공연은 난초를 형상화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검은 옷을 입은 여성 무용수들이 병풍을 연상시키는 세트 앞에서 팔을 펼치며 춤춘다. 난인데 왜 녹색이 아니라 검은색일까. 그는 “허난설헌이 먹을 묻힌 붓으로 난을 치는 모습을 그렸다”고 했다.

화자(話者) 허난설헌 역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인 박슬기(31)·신승원(30)이 번갈아 맡는다. 박슬기는 “허난설헌은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 남편과의 불화, 친정의 몰락, 아이들의 죽음 등으로 비극적 삶을 살았다”며 “그 찬란하고 슬픈 삶을 무대에 풀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덟 쌍의 무용수들이 부용꽃 지는 모습을 표현하는 가운데 허난설헌이 죽음을 맞는 마지막 장면에 그는 가장 큰 애착을 갖고 있다. “슬픔이 절정에 달하는 장면이지만 무용수가 오열할 때보다 감정을 억누를 때 관객은 더 슬퍼요. 서늘하고 아련한 감정을 전하고 싶습니다.”

강효형과 박슬기에게 때마침 낭보가 날아들었다. 다음달 30~31일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수상자가 발표될 세계 무용계 최고 권위상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의 안무가·최우수 여성 무용수 부문 후보에 각각 이름을 올린 것. 이들은 “운이 좋았다”고 겸손해하면서 “세계적인 안무가, 무용수가 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