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윤의 '중국과 中國' (18) 政(정)] 사조직을 인지 못하면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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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윤 < 한국콜마 고문 >
여기서의 정(政)은 흔히 말하는 국가의 정치가 아니다. 사람 간에 또는 기업 같은 조직에서 나타나는 ‘내부 정치’ 또는 ‘암투’를 말한다. 주위에서 흔히 듣는 “그 사람은 일보다는 정치를 잘해!”라는 맥락에서의 정치다. 심지어 “업무는 안 하고, 온종일 정치만 해!” 또는 “잘나가는 이유는 능력이 아니라 줄을 잘 선 거지”의 경우다.
우리말의 암투(暗鬪)가 어감이 좋지 않은 이유는 어둡기(暗)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전통문화는 음양의 상대성을 단순히 선악으로 보지 않는다. 직선상의 양끝이 아니라 서로 돌고 도는 원과 같은 성격으로 파악한다. 외부와의 투쟁이 늘 있듯이 내부에서의 투쟁도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암투라는 말보다는 내투(鬪)라고 말한다. 물론 암투는 중국인들에게도 대부분 긍정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 중국인은 外鬪外行,鬪行(외부 투쟁은 하수지만, 내부 투쟁은 고수다)”이라고 푸념한다.
그 어떤 조직이든 내투는 은밀한 곳에서 정보를 왜곡하고 조직을 와해시킨다. 개인적으로도 시도하지만 대부분 파벌(또는 사조직)을 통해 조직적으로 행해진다.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이익을 중시하며, 한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작동하는 조직’을 만들려고 한다면 중국 내투의 특징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중국인에게 온갖 쓴 말을 하는 짱이민(문화학자)은 “중국인들의 최대 행복은 ‘권자(圈子·사조직)’에 속한 것이고, 이 권자는 자신들에게 행복을 준다 /…/ 중국인들은 조직을 찾기를 좋아한다 /…/ 조직이 있으면 배경이 생긴 것 같다. 스스로를 대단한 권자에 속하게 하면, 다른 이들이 숭배하게 된다”고 말한다. 권자는 회사 밖에서는 사교 모임일 수도 있지만, 조직 내에서는 계파 또는 사조직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일찍이 사조직의 위험성에 대해 관찰했다. “그들은 대기업 집단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개인의 이익에 따라 단독 행동한다. 이런 은폐된 관계망(關係網·사조직)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개인의 이익을 기업 이익 위에 두기 때문이다. 만약 발견되지 않거나 혹은 구속하지 않는다면 (조직에 대한) 파괴성은 상당히 크다.” 더 나아가 “새로운 책임자는 최대한 자신의 사람으로 조직을 구성한다/…/ 회사를 떠날 때 (우리 경우처럼 당사자만 떠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떠난다/…/사람이 갈 때는 그동안의 ‘거래처, 정보 및 기술 등’도 함께 떠나는데, 중국인들은 이를 용인한다.”(고든 레딩 ‘華人資本主義精神’) 공들여서 인재를 키워도 그 인재와 그의 유·무형 자산이 조직에 남지 않고 사유화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인들은 왜 이렇게 ‘아는 이들끼리’에 집착할까? 앞서 중국 사회학의 시조인 페이샤오퉁 교수는 “중국은 아는 이들끼리의 사회”라고 강조했음을 소개한 적이 있다. 물론 마르크스 사상 유입 이후 한동안 중국 전통 사상이 핍박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인들은 공자에 대해 존중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국학(國學)이라고 불리는 전통 중국 사상을 배우는 열풍은 이 사회에서 성공한 자들의 유행이 된 지 오래다.
중국인들은 운명을 믿는다. 임어당은 중국인을 통치하는 세 명의 여신(女神)이 있는데, ‘체면’과 ‘갚음’ 외에 ‘운명’을 꼽았다. 아직도 대부분의 중국인은 운명을 믿고 인연을 인정한다. 민간신앙을 믿고 현재의 체제에서도 유교 사상은 그 근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역을 맹신하며 점 보는 것 또한 즐긴다. 모 학자는 서양과 중국 내세관의 차이점에 유의했다. 서양 내세관은 혈연으로 뭉쳐진 아는 이들끼리의 이승이 아니라 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내세다. 서양의 혈연은 단지 현실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관계에 불과하다. 내세에는 ‘신’을 중심으로 하는,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신도들끼리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한편 중국의 민간신앙 및 유교에서의 내세는 다르다. 비록 내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래도 곳곳에서 이 세상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조상(祖上)’을 의식하고 근신할 것을 가르친다. 중국에서 혈연 등의 인연은 현실에 국한되지 않고 내세에서도 연결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초 모르는 이들이 모인 조직(회사 또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아는 이끼리의 모임(사조직)’은 중시될 수밖에 없다.
류재윤 < 한국콜마 고문 >
우리말의 암투(暗鬪)가 어감이 좋지 않은 이유는 어둡기(暗)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전통문화는 음양의 상대성을 단순히 선악으로 보지 않는다. 직선상의 양끝이 아니라 서로 돌고 도는 원과 같은 성격으로 파악한다. 외부와의 투쟁이 늘 있듯이 내부에서의 투쟁도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암투라는 말보다는 내투(鬪)라고 말한다. 물론 암투는 중국인들에게도 대부분 긍정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우리 중국인은 外鬪外行,鬪行(외부 투쟁은 하수지만, 내부 투쟁은 고수다)”이라고 푸념한다.
그 어떤 조직이든 내투는 은밀한 곳에서 정보를 왜곡하고 조직을 와해시킨다. 개인적으로도 시도하지만 대부분 파벌(또는 사조직)을 통해 조직적으로 행해진다.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이익을 중시하며, 한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시스템적으로 작동하는 조직’을 만들려고 한다면 중국 내투의 특징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중국인에게 온갖 쓴 말을 하는 짱이민(문화학자)은 “중국인들의 최대 행복은 ‘권자(圈子·사조직)’에 속한 것이고, 이 권자는 자신들에게 행복을 준다 /…/ 중국인들은 조직을 찾기를 좋아한다 /…/ 조직이 있으면 배경이 생긴 것 같다. 스스로를 대단한 권자에 속하게 하면, 다른 이들이 숭배하게 된다”고 말한다. 권자는 회사 밖에서는 사교 모임일 수도 있지만, 조직 내에서는 계파 또는 사조직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일찍이 사조직의 위험성에 대해 관찰했다. “그들은 대기업 집단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개인의 이익에 따라 단독 행동한다. 이런 은폐된 관계망(關係網·사조직)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개인의 이익을 기업 이익 위에 두기 때문이다. 만약 발견되지 않거나 혹은 구속하지 않는다면 (조직에 대한) 파괴성은 상당히 크다.” 더 나아가 “새로운 책임자는 최대한 자신의 사람으로 조직을 구성한다/…/ 회사를 떠날 때 (우리 경우처럼 당사자만 떠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사람들과 함께 떠난다/…/사람이 갈 때는 그동안의 ‘거래처, 정보 및 기술 등’도 함께 떠나는데, 중국인들은 이를 용인한다.”(고든 레딩 ‘華人資本主義精神’) 공들여서 인재를 키워도 그 인재와 그의 유·무형 자산이 조직에 남지 않고 사유화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인들은 왜 이렇게 ‘아는 이들끼리’에 집착할까? 앞서 중국 사회학의 시조인 페이샤오퉁 교수는 “중국은 아는 이들끼리의 사회”라고 강조했음을 소개한 적이 있다. 물론 마르크스 사상 유입 이후 한동안 중국 전통 사상이 핍박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중국인들은 공자에 대해 존중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국학(國學)이라고 불리는 전통 중국 사상을 배우는 열풍은 이 사회에서 성공한 자들의 유행이 된 지 오래다.
중국인들은 운명을 믿는다. 임어당은 중국인을 통치하는 세 명의 여신(女神)이 있는데, ‘체면’과 ‘갚음’ 외에 ‘운명’을 꼽았다. 아직도 대부분의 중국인은 운명을 믿고 인연을 인정한다. 민간신앙을 믿고 현재의 체제에서도 유교 사상은 그 근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역을 맹신하며 점 보는 것 또한 즐긴다. 모 학자는 서양과 중국 내세관의 차이점에 유의했다. 서양 내세관은 혈연으로 뭉쳐진 아는 이들끼리의 이승이 아니라 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내세다. 서양의 혈연은 단지 현실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관계에 불과하다. 내세에는 ‘신’을 중심으로 하는, 믿음을 중심으로 하는 신도들끼리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한편 중국의 민간신앙 및 유교에서의 내세는 다르다. 비록 내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래도 곳곳에서 이 세상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조상(祖上)’을 의식하고 근신할 것을 가르친다. 중국에서 혈연 등의 인연은 현실에 국한되지 않고 내세에서도 연결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당초 모르는 이들이 모인 조직(회사 또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아는 이끼리의 모임(사조직)’은 중시될 수밖에 없다.
류재윤 < 한국콜마 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