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대화카드 꺼낸 트럼프] "카터보다 더 좋은 대북특사 있다"…미국, 북한과 물밑협상 시작하나
지난달 22일 브라이언 훅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 내정자와 사라 샌더스 백악관 부대변인이 조지아주에 있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자택을 찾았다. 이들은 카터 전 대통령에게 한반도 현황과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 등을 브리핑한 뒤 대북 특사(特使)로 활동하고 싶다는 그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평양을 방문해 북·미 협상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2010년 2차 방북 때는 억류된 미국인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백악관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트럼프 정부는 대북 강경 기조 속에 특사 파견으로 혼선을 빚을 것을 우려한 게 아니라 이미 준비하고 있는 대북 특사가 있어 예의를 갖춰 카터 전 대통령의 제안을 고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정부가 대기시켜 놓은 대북 특사 후보는 기업인 출신으로 앞으로 한반도 문제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인물로 알려졌다.

◆“트럼프 시계 2020년에 맞춰져”

[북한에 대화카드 꺼낸 트럼프] "카터보다 더 좋은 대북특사 있다"…미국, 북한과 물밑협상 시작하나
워싱턴 정가에서 “트럼프의 시계는 2018년(의회 중간선거)과 2020년(차기 대통령 선거)에 맞춰져 있다”는 얘기는 정설에 가깝다. 그의 모든 일정이 다음 선거에 맞춰져 있다고 한다.

그가 백악관에 초청하는 외부인사 대부분은 지난해 대선에서 박빙으로 승리할 때 자신의 승리에 쐐기를 박은 위스콘신, 미시간, 펜실베이니아주 등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 지역 사람들이다. 지난달 29일 취임 100일을 맞아 백악관 출입기자 주최 만찬장 대신 달려간 곳도 펜실베이니아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공(功)을 들이는 이슈가 ‘북핵’인 것도 선거와 밀접해서다. “북핵만 잘 처리하면 내년 중간선거 승리는 떼어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백악관 주변에서 흘러나온다. 무역적자는 중국 일본 멕시코 한국 등 미국의 교역상대국이 알아서 줄여줄 테니 걱정할 게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북핵 해결은 쉽지 않다.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까지 동원한 ‘최고 수준의 압박과 개입’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성공하리란 보장이 없다. 그래도 트럼프 대통령은 전임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그는 ‘빚’이 없다. 소속인 공화당에도, 동맹들에도 갚아야 할 빚이 없다. 북한에 사용할 카드가 비교적 자유롭다고 주변에서 얘기하는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서전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에서 “나는 거래가 좋다. 큰 거래를 좋아한다. 거기서 희열을 얻는다”고 썼다. 백악관 소식통은 “그는 김정은과 ‘빅딜’을 하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최고의 압박은 딜을 위한 수단이다. 대북 특사는 손에 깜짝놀랄 만한 제안을 들고 북한을 방문할 것으로 전해졌다.

◆‘제네바 합의’ 악몽 재연될까

북·미 간 직접 대화에 한국은 난처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한국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방위비 분담 등 ‘3종 재협상 세트’를 들이밀었다. 차기 한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반한(反韓) 모드’로 돌변했다. 한국에 크게 서운한 게 있다는 후문이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한국과 북한 간 대화채널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을 제외한 채 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설 경우 한국은 치명적인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의 악몽이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다.

당시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 가능성이 거론되던 1차 핵위기 이후 북한은 철저한 ‘통미봉남(通美封南:남한을 제쳐놓고 미국과 대화)’ 전략 아래 미국과의 직접 대화로 경수로를 얻어냈다. 한국은 협상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경수로 비용 40억달러 중 70%(28억달러)를 댔다.

한국 정부의 다른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 옆에 있는 외교·안보라인 인사들은 한·미 동맹의 가치와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이라며 “우리가 트럼프 대통령의 말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더 큰 리스크”라고 말했다.

‘한국도 재선 카드 중 하나’로 생각하는 트럼프 대통령, “한·미 동맹은 철석 같다”는 수사(修辭)에 매달리는 한국 정부, 이런 인식의 간극이 본질적인 리스크일 수 있다.

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