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 3500억 쏟아붓고 팹리스 150곳 확보
동부하이텍, 4차 산업혁명 맞아 진가 발휘
팹리스 확보가 관건인 파운드리
"신생업체 못 믿겠다" 번번이 퇴짜
적자나도 매년 R&D 투자 늘려
시제품 가격 파격 인하하고 설계 SW 무상 대여로 고객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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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하이텍의 성공적 생환은 까다롭고 변덕스럽기로 정평 난 팹리스라는 고객군을 끈질기게 넓혀나간 임직원의 뚝심과 끝까지 사업을 포기하지 않은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의 ‘20년 인내’를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평가다.
이 회사의 업(業)은 파운드리다. 메모리 반도체 회사처럼 스스로 제품을 설계하고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고객사 주문을 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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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회장의 참패였다. 2013년까지 17년 연속 적자에 누적 순손실은 3조원을 넘어섰다. 2000년대 초 산업은행 등으로부터 빌린 1조2000억원은 회사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연평균 600억원 정도를 연구개발(R&D)에 투자했다. 국내외 유능한 경영자와 엔지니어들도 적극 영입했다. 2000년대부터 주력해온 저전력 반도체인 아날로그 반도체에서 서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날로그 반도체는 압력과 온도, 전력, 음성 등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전환해 전달하는 반도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스마트폰 시장이 확대되며 수요가 크게 늘었다. 오랫동안 지켜만 보던 일본 등 해외 팹리스도 서서히 제품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재무구조 개선에도 박차를 가했다. 김 회장은 2009년 당시 오너 경영자로는 사상 최대 규모인 3500억원의 사재를 회사에 털어넣었다. 구조조정과 자산 매각도 병행해 3년에 걸쳐 한때 2조5000억원에 달한 부채 규모를 8000억원대로 떨어뜨렸다.
반전의 결정적 계기는 팹리스와의 상생적 생태계 구축이었다. 웨이퍼 한 장으로 다양한 반도체의 시제품을 만들 수 있는 ‘MPW(멀티 프로젝트 웨이퍼) 프로그램’이 대표적이었다.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한 뒤에는 실제로 잘 작동하는지 시제품을 만드는 과정이 필수다.
국내 팹리스는 대부분 매출 1000억원 이하로 영세해 장당 1억원 이상인 웨이퍼값을 낼 돈이 없었다. 하지만 MPW를 활용하면 시제품 제작 단가를 기존의 20% 이하로 낮출 수 있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에 필요한 소프트웨어(SW)도 동부하이텍이 무상으로 제공하기로 했다. 구입해서 쓰려면 수천만원이 필요한 SW다. 파운드리 라인을 공개해 설계 단계부터 동부하이텍의 공정을 고려해 반도체를 제작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2001년 50여개에 불과했던 동부하이텍의 팹리스는 2015년 150개까지 늘었다.
4차 산업혁명도 파운드리 사업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사물인터넷(IoT)과 드론, 자율주행차 등에 들어가는 센서는 새로운 주문형 반도체를 요구하고 있다. 최창식 동부하이텍 사장은 “파운드리 사업 모델이 뿌리를 내렸고 고객 기반도 미국 일본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공장 가동률은 90%까지 올랐고 영업이익률은 20%대의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연간 영업이익은 2015년 1244억원, 2016년 1718억원에 이어 올해는 2000억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우리는 비메모리 사업에 헌신해 조국 근대화에 기여한다.” 음성과 부천 공장에 걸려 있는 김준기 회장의 친필 액자가 이제야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다.
■ 팹리스
fabless.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장(fab) 없이 반도체 설계와 판매만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다. 설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반도체 생산만을 전문으로 하는 파운드리에 위탁해 반도체를 생산한다. 세계 스마트폰의 85%에 자사가 설계한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공급하는 영국의 ARM이 대표 기업이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