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산업 경쟁력의 핵심 '개념설계'…"고수를 키워라"
국내 최고층 빌딩인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건축설계는 미국의 초고층 전문 설계업체 KPF가 맡았다. 75만t의 건물 하중을 버티도록 하는 토목설계는 영국 ARU가, 구조설계는 미국 LERA가, 초속 80m의 강풍을 견딜 수 있는 풍동설계 컨설팅과 검증은 캐나다 RWDI가 수행했다. 세계적 수준의 빌딩을 국내에 세웠지만 중요한 개념설계는 모두 글로벌 선진기업이 하고, 국내 기업은 이를 토대로 실행하는 역할만 했다는 얘기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는 《축적의 길》에서 이런 사례를 들면서 “우리 기업과 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핵심적 이유는 개념설계 역량 부족”이라고 강조한다. 개념설계란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을 그려내는 것, 즉 백지 위에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수주한 육상플랜트에서 이윤이 나지 않고, 조선업계가 수주한 해양플랜트에서 몇 년간 계속 대규모 적자가 난 것도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이 책의 기본적인 문제 인식은 2015년 출간된 《축적의 시간》과 동일하다. 어떻게 개념설계 역량을 키울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 전작과 다른 점이다. 저자는 개념설계 역량에 관한 다섯 가지 착각을 지적하며 다섯 가지 ‘축적의 전략’을 제시한다. 그 착각들은 △부족한 개념설계 역량은 사오면 된다 △창의적 아이디어가 없어서 문제다 △개념설계는 국내에서 하고 생산은 개발도상국에서 하면 된다 △꼭 선진국이 아니라도 개념설계는 할 수 있다 △중국은 우리의 생산공장이다 등이다.

개념설계 역량은 철저히 인적 자산이다. 기업만 인수합병한다고 자동으로 따라오는 게 아니다. 축적의 경험을 담는 궁극의 그릇인 ‘고수’를 키워야 한다. 아이디어가 많다고 개념설계가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중장기적인 투자와 지속적 업그레이드를 거쳐야 개념설계로 발전한다. 또한 국내 제조업 현장에서의 경험 축적이 필수적이다. 중국은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니라 광대한 자국 시장을 통해 그런 축적에 필요한 시간을 압축하며 개념설계의 사례를 잇달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진단을 토대로 저자는 △고수를 키워라 △스케일업 역량을 키워라 △시행착오를 뒷받침할 제조현장을 키워라 △고독한 천재가 아니라 사회적 축적을 꾀하라 △중국의 경쟁력 비밀을 이해하고 활용하라고 강조한다. 아울러 기술 선진국이 되기 위한 축적의 길로 가는 네 가지 열쇠로 △고수의 시대 △스몰베팅 스케일업 전략 △위험공유 사회 △축적 지향의 리더십을 제시한다. 고수 괴짜 덕후를 존중하는 사회·문화적 분위기, 다수의 작은 선택적 과제에서 시작해 중장기적으로 꾸준히 스케일을 키워가는 스몰베팅 전략, 전임자의 기록과 경험을 존중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교정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쌓아 올리는 축적 지향의 문화, 시행착오의 위험을 여럿이 나눠 지고 이를 격려해주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