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 정진규(1939~)

[이 아침의 시] 민들레 - 정진규(1939~)
슬픔이란 말을
바람 속에 가만히 놓아두고 바람으로
가만히 흔들리게 하면서
직전까지 와 있었다
하얀 위태로움!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져 있었다
바라보는 나는 참기가 어려웠다
상처가 어두움이
그렇게 깊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을 즐겨온 게 분명했다
普光寺 부처님 만나러 가는 봄날,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고 그것만
보였다
그런 슬픔의 꼭지를 홀로 만나는 고요!
물소리 하나가 잠시 끼여들었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오늘까지

시집 《몸詩》(세계사)中

민들레 씨앗들이 바람을 탄다. 슬픔이란 말을 바람 속에 가만히 놓아둬 본다. 슬픔도 바람을 타니까 가벼워진다. 민들레 피었다가 지는 사이, 봄이 가고 초여름이 온다. 보광사(普光寺) 부처님 만나러 가는 길, 민들레 날아가라고 바람이 잘 분다. 이 바람 불어서 어느 슬픔을 닦아줄 비가 왔으면 좋겠다. 물소리 하나가 잠시 끼어들어보지만, 그 슬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가 보다. 아버지 유언 듣지 못하고, 목 놓아 울부짖고 싶다던 젊은 시인도 있다. 그대여 오늘까지만 그 슬픔을 기억하길! 바람이 단단한 것만 꺾을 기세로 분다. 민들레는 먼 곳까지 날아가겠다.

이소연 < 시인(2014 한경 신춘문예 당선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