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진 씨의 ‘Pop Visual Poetry’.
권현진 씨의 ‘Pop Visual Poetry’.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중략)/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정지용(1902~1950)이 22세의 젊은 나이에 쓴 ‘향수’라는 시다. 고향에 대한 추억을 마치 눈앞에서 전개되는 영상처럼 구성하고, 청각적 요소를 시각화한 게 돋보인다.

한 편의 시적 여운을 알록달록한 추상미학으로 조형화하는 화가가 있다. 3차원의 조각 회화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권현진 씨(37)다.

권씨가 13일 서울 한남동 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시작한다.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하고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 유학한 권씨는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아트 석사학위,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으며 문학과 미술의 시각적 유사점을 붓끝에 흘려보내 왔다. 다음달 10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 주제는 ‘불가시의 가시화(Visualization of the Invisible)’. 풍경화가들이 보여주는 붓끝의 기교가 아니라 가슴에서 배어나는 울림을 현란한 오방색 언어로 묘사한 입체추상화와 영상 설치 작품 등 30여점을 건다. 마음속 다채로운 기억의 언어를 마치 시인처럼 화면에 끄집어낸 작품들이다.

어릴 적부터 보이지 않는 세상에 관심이 많았다는 작가는 “눈을 감아도 빛이 아른거리는 이미지들은 환영처럼 끝없이 부유한다”며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풍경을 시적 미감으로 아울렀다”고 설명했다. 권씨의 작품은 이렇듯 ‘존재하지 않는 가상성’을 현란한 원색의 시구로 묘사한 게 특징이다. 부드럽게 펼쳐진 바닷가의 모래언덕, 조용히 흐르는 듯한 강물, 어린 시절 고향 풍경 등을 봄싹을 피워 올리듯이 화면에 한 편의 서정시처럼 수놓았다.

작가는 작품 제작과정에서도 추상화의 실험을 위해 조각 기법을 고집한다. 먼저 스테인리스 강판을 쇠망치로 수만 번 두드려 요철과 입체감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여러 색상의 물감을 흩뿌리거나 붓질한 몽환적 이미지를 전사(轉寫)기법으로 올려놓으면 3차원 입체추상화가 탄생한다. 현란한 색채들은 자유분방하면서도 기운이 생동하는 리듬감으로 꿈틀거리고, 실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화면 위에서 시적 언어로 되살아난다.

장 샤를르 장봉 전 프랑스 파리8대학 교수는 권씨의 작품에 대해 “색과 선, 빛과 그늘을 당당하게 보여준다. 용암이 분출하는 지구 표면의 움직임 같다”고 평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