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한글·한자 100년 전쟁
‘사필귀정=4필의 말을 타고 돌아옴. 즉 성공해 온다는 말.’ ‘OO여인숙=여인이 머물러 있는 곳.’ ‘古稀紀念(고희기념)=고대 희랍 축제일.’ ‘新株(신주)=새로운 전봇대.’

한때 시중에서 유행하던 유머 한자성어가 아니다. 1970년대 한 조사에서 대학생들이 실제 답한 내용이다.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이 이끌던 한국어문교육연구회는 1973년 4월20일 ‘대학생들의 국어실력’이란 자료를 발표했다. 서울대 등 전국 12개 대학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자 이해도를 조사한 결과였다. 전국의 신문이 ‘한심한 대학생 국어실력’ ‘한자 까막눈’ 등 강렬한 제목을 달아 대서특필했다.

한자파와 한글파의 논쟁은 100년 넘게 이어져온 뿌리 깊은 갈등이다. 그 단초는 갑오개혁 때인 1895년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고종 칙령 1호다. 이때부터 한글이 공식적인 문자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혹독한 우리말 말살정책을 편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말 되살리기 운동은 필연적이었다. 이는 한자와 일본어 잔재의 추방으로 이어졌다. 당시 한자파와 한글파 간 갈등은 험악했다. “한글파에서는 비행기를 날틀로,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배꽃계집애오로지배움터로 하자고 한다더라”는 악선전이 나온 것도 이때였다. 飛行機를 비행기라고 쓰면 충분하다는 게 한글파의 주장이었다.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은 “우리는 날틀 같은 것을 주장한 일도 없거니와 그것은 너무도 졸렬한 새말이다. 일부러 되잖은 번역을 함으로써, 한자말을 우리말로 옮기려는 운동을 우스운 장난처럼 만들어 방해하려는 태도”라고 분개했다.(‘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195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9년 한글날을 맞아 “명실공히 ‘한글을 전용하는 한국’을 만들자”는 담화문을 발표하는 등 강력한 한글전용 정책을 폈다. 대학생 한자실력 조사는 그런 시대 흐름 속에서 나온 위기감의 발로였다. 결국 문교부(현 교육부)는 1972년 교육용 기초한자 1800자를 발표한 데 이어 1974년엔 중·고교 교과서에 한자병용 방침을 결정했다. 교육부가 지난해 말 확정한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방침, 그것을 막으려는 한글파의 반발은 반세기 넘게 끌어온 한글·한자 전쟁의 연장선인 셈이다.

모든 글은 한글을 바탕으로 한다는 고종의 칙령은 컴퓨터 시대에 들면서 자연스레 실현됐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한자·한자어로 이뤄진 지적 사유의 토대가 부실해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말에서 한글과 한자를 함께 살찌우는 길은 정녕 찾기 어려운 것일까.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