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또다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거론했다. 지난달 27일 한·미 FTA 종결을 언급한 지 채 보름도 안 돼서다. 잇따른 재협상 발언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전략의 일환인지, 한국과의 관계 전반을 염두에 둔 압박카드인지 불분명하다. 다음달로 예상되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날 전망이다.
트럼프, 보름 만에 또 한·미 FTA 거론…문재인 대통령에게 '견제구'?
◆잇따른 압박 배경은

한국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는 지난해 277억달러(약 31조원)였다. 중국과 유럽연합(EU) 등에 이어 흑자 규모 기준 세계 6위다. 다만 최근 들어 대미 무역흑자가 급감하고 있다. 올 들어 4월 말까지 60억4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91억4000만달러)보다 34% 줄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적자가 줄고 있는데도 한·미 FTA를 ‘끔찍하다’며 재협상(또는 종결)을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미국의 무역적자를 전체적으로 줄이기 위해 개별 흑자국을 압박하는 조치의 일환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한·미 FTA를 포함한 모든 무역협정에 문제가 없는지 전면 재검토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 상무부와 무역대표부(USTR)는 180일 내 각 무역협정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분석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한국과의 관계 전반을 감안한 ‘노림수’라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통령선거 때부터 대중국 무역적자 개선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지난달 초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뒤 “중국이 북핵문제 해결을 돕는다면 어느 정도의 무역수지를 감내할 가치가 있다”며 물러섰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미국의 전체 무역적자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3.8%로 크지 않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큰 판’을 흔들길 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미 FTA 재협상 문제뿐 아니라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비용, 주한미군 주둔비(방위비) 분담금 증액, 환율조작국 지정 등 다양한 카드를 활용해 대북 정책이나 아시아 전략에서 한국 정부의 추가 양보를 얻어낼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다.

◆재협상에 무게?

한·미 FTA를 폐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한국과의 FTA로 이익을 보고 있는 미국 내 이해관계자들의 반대가 만만찮고, 미국이 더 큰 피해를 본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한·미 FTA가 폐기되면 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규정에 따라 최혜국대우(MFN) 관세율을 적용받는다. 한·미 FTA 내에서 양국의 관세율은 0%에 가깝다. MFN 관세율은 한국이 4.0~9.0%, 미국이 1.5~4.0%다. 관세율 상승으로 한국의 대미 수출 감소는 13억달러, 미국의 한국 수출 감소폭은 15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한국산업연구원은 추산했다.

재협상 절차도 까다롭다. 기존 무역협정을 재협상하려면 협상 개시 때와 똑같은 절차를 밟아야 한다. 협상 개시 90일 전 의회에 서면 통보해야 하고 재협상 결과도 의회 승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편파적인 협상이 아니라 공정한 협상을 원한다”며 “우리가 공정한 협상을 하게 되면 미국은 매우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폐기보다는 협정 일부 개정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청와대, 통상비서관 신설

재협상 시기는 일러야 내년 하반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미국 입장에서 가장 급한 것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이라며 “협상 주무부처인 USTR 대표가 11일 상원 인준을 마쳤기 때문에 90일간의 의회 통보 기간을 감안하면 오는 8월 중순께 재협상 개시가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NAFTA 재협상을 아무리 서둘러 마쳐도 연말까지는 어렵기 때문에 한·미 FTA 재협상 시기는 자연스럽게 내년 이후로 밀린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한·미 FTA 재협상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통상비서관제를 신설했다. 통상비서관은 청와대 경제수석이 아니라 정책실장의 지휘를 받게 된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