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갑영 칼럼] 기부문화 선진화 위해 법제도 개선해야
장학재단의 기부로 세금 폭탄을 맞았던 황필상 대표의 법적 투쟁은 척박한 기부문화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끄러운 송사(訟事)였다. 다행히 대법원에서 승소했다지만 180억원의 주식을 기부한 기업인에게 증여세와 가산세까지 총 225억원을 부과했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기부자의 선의를 왜곡해 중과세로 징벌한다면 이런 법규와 관행이야말로 서둘러 청산해야 할 적폐 아니겠는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선을 베푸는 기부문화는 선진화를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의 하나다. 따라서 선진국일수록 기부를 장려하는 법규와 높은 시민의식이 결합돼 교육과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모금이 활발하게 이뤄진다. 미국에서는 2015년 한 해에도 총 3732억달러(약 425조원)에 달하는 기부가 이뤄졌다. 기부로 조성된 사립대학 운용기금도 엄청나게 많아 하버드대는 357억달러(약 40조원)에 이르고, 상위 10대 대학이 평균 182억달러(약 20조원)나 된다.

기부문화가 열악한 우리에게는 이런 숫자가 동화 속 전설처럼 들린다. 소득 차이 때문일까? 학교 사업을 위해 2만2000명의 기부자를 모았던 필자의 경험에서 보면 기부는 결코 소득 수준에 비례하지 않는다. 소득이라면 한국의 가구당 소득은 이미 미국의 70%에 달하고 구매력을 반영한 근로자의 가처분 소득은 오히려 우리가 더 높다는 통계도 있다. 다만 취약한 공동체 문화와 시민의식, 미흡한 세제와 가족에 대한 지나친 집착 등으로 기부를 주저할 뿐이다.

한국에서는 특별한 관계가 없는 제3자에게서 단 10만원의 기부를 유도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다. 자산이 많은 거부들도 한 곳에만 기부하기가 어렵고, 노조나 가족의 눈치가 보이며, 때로는 세무조사 우려가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핵심은 역시 선뜻 기부할 마음이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제 혜택까지 열악하니 구두 몇 켤레가 닳아도 모금은 어렵기만 하다.

그렇다고 낙망할 필요는 없다. 대법원까지 법정 투쟁을 벌인 황 대표와 같은 선각자들의 결단이 점차 세상을 바꿔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 더, 고(故) 김순전 할머니의 감동적인 사연을 소개하고 싶다. 2012년 여름, 당시 90세이던 김 할머니에게서 100억원 상당의 자산을 기부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총장을 만나보고 최종 결정하겠다는 바람에 100억원이 걸린 면접시험(?)을 치렀다. 김 할머니는 어려운 학생을 위한 장학금으로 거의 전 재산을 흔쾌히 쾌척했다. 가족에겐 일부만 남겼을 뿐 신분도 밝히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북에서 이불 한 장 갖고 내려와 평생 미장원 한 번 가지 않고 버스비가 아까워 몇 개 정류장을 걸어다니며 행상에서부터 해보지 않은 일 없이 힘들게 모은 재산이라고 했다. 산전수전을 겪은 할머니의 평생 사연을 간간이 들을 때마다 벅찬 감동과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구십 평생 힘들여 모은 큰 자산을 아무 연고도 없는 대학에 어떻게 기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런 감동도 결국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마무리됐다. 김 할머니는 기부한 지 1년을 채 못 넘기고 고인이 됐고 유족들은 유류분(遺留分)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공증은 물론 등기까지 마쳤지만 학교는 상당 부분을 반환하라는 법원의 조정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 내용은 차치하고, 고인의 숭고한 유지와 아름다운 정신이 경직된 법규 때문에 퇴색돼 아직도 안타깝기만 하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한국 사회에 선진화된 기부문화를 정착시키는 개혁의 이정표가 돼야 한다. 부자 규제라는 이념의 프레임에 묶여 공익법인에 대한 주식 기부를 규제하고 기부금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꾼 개악 등은 하루빨리 개선돼야 한다. 부자의 기부를 규제한다고 양극화가 해소될 리 없고 소외계층의 소득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부를 촉진하는 법규와 시민의식을 고취시켜 소외계층을 배려하며 함께 발전하는 건강한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정갑영 < 한국생산성본부 고문˙전 연세대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