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이 기업에 요구하는 것은 대(大)융합이다. 융합하기 위해선 업종의 벽을 넘어야 한다. 이(異)업종, 타(他)산업의 장점을 결합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품질 가격을 중시하던 산업경쟁력은 멋과 정서를 얘기하는 문화를 배워야 한다. 반도체 같은 첨단기술 기반의 제조업도 디자인이 더해지지 않으면 제값을 받기 어렵다.

품질이 아니라 정서를 팔아야

18세기 산업혁명 이래 근대 사회의 중심 개념으로 등장한 ‘경제’는 효율을 가장 중시했다. 빨리 만들고, 싸게 만드는 것이 20세기 중반 이전까지의 화두였다. 1950년대 이후엔 품질과 마케팅이 승부를 갈랐다. 잘 만들고, 사고 싶게 만들어야 승리했다.

그러나 정보가 사실상 완전히 공개된 21세기 들어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특히 정보통신기술(ICT)에 바탕한 4차 산업혁명은 규모의 경쟁력까지 사실상 없애 버리고 있다. 자체 공장이 없어도 아이디어만 있으면 제조업을 할 수 있게 됐다. 신제품 아이디어를 쉽게 설계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넘친다. 금형을 만들지 않아도 3차원(3D)프린터로 모형을 제작해 생산을 의뢰할 수 있다. 로봇과 사물인터넷(IoT)을 기반으로 24시간 다품종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스마트공장이 대기하고 있다. 제조업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사회학자들을 중심으로 ‘산업의 문화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유다. 효율과 품질, 가격경쟁력이 의미를 잃어 가는 시대에 기업이 살아남는 길을 문화화로 보는 견해다. 물건이 아니라 거기에 묻어 있는 문화를 더 중시한다. 꿈과 멋과 재미를 팔되, 마케팅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정서적인 상품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발 한 켤레를 살 때마다 한 켤레씩을 제3세계 어린이들에게 기부하는 모델로 성공을 거둔 미국의 탐스슈즈가 보여준 것이 바로 산업의 문화화다. 구매자들은 ‘기부’라는 정서에 끌린 것이다. 아모레퍼시픽 등 국내 화장품업체들이 한류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게임의 경우는 산업의 문화화에 이미 가속이 붙고 있다. 호주의 보험회사 NRMA는 고객들에게 ‘주차 챌린지’라는 게임을 제공하고 이 게임에서 점수를 많이 따면 보험료를 깎아준다. 보험의 선택 기준을 가격이나 보장이 아니라 ‘재미’로 만든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게임은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대표적 기술인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인공지능(AI) 로봇 빅데이터 IoT 등에 바로 적용되고 생활과도 밀접하기 때문에 산업의 문화화에 가장 적합한 영역이기도 하다.

새 정부 정책의 핵심 아젠다로

산업 그리고 더 큰 의미의 경제는 이제 문화화해야 성장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단초는 이미 ‘명품’의 성공 사례를 통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루이비통 샤넬 베르사체 등에 묻어 있는 것은 장인정신이 아니라 문화의 향기다. 애플이 승부를 걸고 있는 것도 기술이 아니라 새로운 팬덤으로서의 문화다.

산업의 문화화는 사실 지난 박근혜 정부의 화두였다. 지난해 6월에는 9개 부처가 참여하는 ‘산업의 문화화 협의체’가 출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를 뒤엎은 최순실 스캔들 속에서 잊히고 말았다. 그러나 이 추세는 정권의 문제가 아니다. 새 정부가 산업의 문화화를 넘어서는 ‘경제의 문화화’를 화두로 밀고 나가기를 기대한다.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