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간 통신사(通信使)가 돌아오기 보름 전이었던 1591년 2월16일. 좌의정 류성룡(柳成龍)이 정읍현감(종 6품)이던 이순신(李舜臣)을 전라좌수사(정 3품)로 천거했다. 육군 중위를 해군 지휘관으로 발탁한 셈이니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류성룡은 1주일 내내 선조를 설득해 허락을 받아냈다. 이순신의 성품과 충성심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국한 통신사의 정사 황윤길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라고 했고 부사 김성일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선조는 안심해도 된다며 짓고 있던 성곽 공사마저 그만두게 했다.

그 와중에 당파 싸움은 심해졌다. 외국 정세에 어두워 나날이 강성해지는 일본을 ‘왜놈’이라고 무시했다. 당시 일본 인구는 3200여만 명, 조선 인구는 500여만 명(호적상)으로 6배 차이였다. 군사력 격차는 훨씬 컸다. 류성룡은 이순신에게 각종 병법서와 무기 관련 정보 등을 보내 참고하도록 했다. 이순신은 이를 바탕으로 전투력을 키웠다. 1년간의 준비 끝에 거북선 축조까지 마쳤다.

거북선이 완성된 다음날(4월13일) 임진왜란이 터졌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진격했다. 피란길에 오른 선조는 명나라로 도망가겠다고 했다. 류성룡의 거듭된 만류로 평양성에 머물기로 한 선조에게 1주일 후 첫 승첩이 들려왔다. 이순신의 옥포해전 대승. ‘23전승 불패’ 신화를 연 첫 전투였다. 류성룡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순신의 이름을 되뇌었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한 동네에서 자랐다. 류성룡은 세 살 아래인 이순신의 됨됨이를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문·무과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나라를 위하는 일에는 늘 한마음이었다. 이순신이 강직한 성격 때문에 고초를 당할 때도 류성룡은 원군이 돼줬다. 그런 류성룡을 이순신은 극진히 예우하고 존경했다. 둘은 조선의 빛나는 콤비였다. 안타깝게도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던 날, 류성룡은 반대 세력에 밀려 파직당했다. 국난을 극복한 두 위인이 전쟁 종료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류성룡은 낙향 뒤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지난 일을 반성하고 미래를 대비하자는 이 책은 전쟁을 막지 못한 통한과 반성, 이순신 천거, 이순신 승전과 장렬한 최후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이순신이 조선의 영웅이라면 ‘불멸의 이순신’을 영구히 새긴 것은 류성룡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징비록》의 교훈을 잊고 30년도 안 돼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의 치욕을 연달아 겪었다. 오늘은 류성룡 서거 410주년. 옛일을 되새겨 새 날을 준비하려 했던 그의 뜻을 다시금 생각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