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지평리 전투와 몽클라르 장군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된 1951년 2월 중부전선.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유엔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자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파상공격을 감행했다. 병력이 집중된 곳은 강원 횡성 삼마치 고개와 경기 양평 지평리였다. 삼마치 고개의 한국군과 미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후퇴했다. 지평리의 미 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1.6㎞ 길이의 거대한 원형진지를 구축하고 사수 작전에 돌입했다. 미군과 프랑스군 5600여 명과 중공군 3만여 명의 사흘 밤낮에 걸친 혈투가 이어졌다.

적군은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아군 피해는 사망 52명, 부상 259명에 그쳤다. 중공군의 ‘개미떼 전술’을 견고한 방어진지와 백병전으로 물리친 최초의 전투였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 전쟁의 판세를 역전시킨 2대 전투로도 꼽힌다. 이 덕분에 자신감을 되찾은 유엔군은 다시 북진에 나설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가장 빛나는 공을 세운 인물은 프랑스 대대를 이끈 랄프 몽클라르 중령이었다. 그는 중공군의 피리와 나팔 소리에 병사들이 불안해할까 봐 수동식 사이렌으로 ‘맞불’을 놓고, 백병전에도 직접 뛰어든 지장(智將)이자 용장(勇將)이었다. 총검으로 돌격할 땐 빨간 수건을 머리에 매고 싸워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한 달 전 원주 전투에서도 25명의 소대원이 총검으로 인민군 1개 대대를 섬멸함으로써 미군 장성들을 놀라게 했다.

몽클라르는 1, 2차 세계대전을 다 겪은 3성 장군이었다. 6·25 당시 프랑스는 전후 복구 등으로 여유가 없어 한국에 군사고문단 12명만 보내려 했다. 그러자 그가 전국을 돌며 600여 명의 부대원을 모았다. 대대급은 중령이 지휘해야 한다는 규정에 맞춰 스스로 계급을 중장에서 중령으로 낮추면서까지 참전했다. 임신 중인 아내에게는 “자유를 위한 여정은 군인의 성스러운 본분”이라며 안심시켰다.

그의 본명은 라울 샤를 마그랭베르느레. 헝가리 이민자 아들인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프랑스가 독일 수중에 떨어지자 영국으로 망명해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쳤다. 그때 쓴 가명이 몽클라르다. 이 위대한 전쟁 영웅이 1964년 타계하자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그의 장례식을 직접 주관하며 눈물을 훔쳤다.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 김성수 법무법인 아태 대표 변호사가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해 몽클라르 장군 알리기에 나섰다. 자서전을 한국어로 출간하고 사진집도 한·불·영문판으로 냈지만 아직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오늘은 그의 53번째 기일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