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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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수의 본류인 자유한국당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보수정권 탄핵과 대선 참패로 지지가반이 무너졌다. 지지율은 10%안팎까지 떨어졌다. 대선 패배 직후 자성하는 목소리조차 없었다. 패배주의에 무사안일주의가 더해지면서 무기력증에 빠졌다. 위기감도 찾아볼 수 없다. 강한 야당 건설은커녕 벌써부터 친박(친박근혜)과 비박(비박근혜)계의 당권싸움으로 시끄럽다. 보수의 가치는 희미해졌다. 차기 주자 등 구심점이 보이지 않는다. 내년 6월 지방선거는 물론 5년 뒤 정권교체에 대한 비관론이 팽배하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총체적 위기다.

◆무너진 지지기반

‘진보는 분열로 망하고 보수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는 이 등식이 어느정도 성립했다. 이번은 아니다. 진보는 단합했고, 보수는 부패한 이미지를 덮어쓴데다 분열까지 했다. 그게 대선 결과다. 한국당은 대선에서 그냥 진 게 아니다. 참패했다. 지지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됐다. 홍준표 후보가 대선 때 얻은 득표율은 24%다. 선거비 보전(15%)을 걱정했던 선거전 초반 분위기를 감안하면 선전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35%정도로 추정되는 보수 기본표에도 크게 미달한 초라한 성적표다. 90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치러진 대선에서 보수당 후보가 40%를 넘기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한국당의 지역, 세대기반이 다 무너졌다”며 “그래도 아직 지지기반이 남아있는 것 아니냐는 막연한 기대는 말 그대로 기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강세를 보였던 50대에서도 패했다. 전통적인 2040(진보진영)대 5060(보수진영) 대결구도가 이번에는 2050(진보)대 60대이상(보수)으로 바뀌었다. 과거 40대가 쥐고있던 캐스팅보트가 50대로 넘어갔다. 50대에서도 팽팽한 승부를 예고함에 따라 세대전쟁에서 이길수 없는 상황이다. 5060의 지지라는 세대기반이 사실상 붕괴된 것이다.

지역적으로는 수도권 기반이 무너졌다.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서 홍 후보는 20% 득표에 그쳤다. 대구 경북(TK)에서 40%대 득표율로 1위를 했지만 80%대였던 지난 대선에 비하면 거의 반토막이 났다. 부산 울산 경남(PK)은 더이상 한국당의 텃밭이라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위기감 없는 여당같은 야당

한국당의 대선 평가토론회가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열렸다. 대선에서 참패한 지 3주일 만이다. 그마나 네탓공방으로 시끄러운 자리였다. 대선 패배 후 진정한 자성의 목소리는 없었다. 되레 “그 정도면 선전”이라는 이상한 평가가 나왔다. 이 같은 인식은 패배주의와 무사안일주의가 더해진 결과다. 대선이 끝난 뒤 상당수 의원은 아예 지역구에서 산다고 한다. “마땅히 할 일도 없고 의욕도 없다”는 것이다. 지지율이 땅에 떨어진 당에 기대할 게 없으니 차라리 지역구 관리라도 열심히 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다.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전투력 부재’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않다. 여당이 두려워하는 ‘저격수’가 안보인다. 과거엔 홍준표 이정현(정치 사회분야) 이한구 최경환(경제분야) 등 대여 저격수가 즐비했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한 영남 중진의원은 “당내에 패배주의와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하다”며 “과거엔 의원들이 저격수를 응원했지만 지금은 냉소적이어서 아무도 그런 역할을 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다른 중진의원은 “국회의원을 왜 하는지 목표의식이 없는 의원들이 적지않다”고 지적했다. 정권 창출을 목표로 모인 정치결사체라는 인식이 희미해지면서 고소득 직장인에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아직도 여당 의원으로 착각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는 얘기는 공공연하다.

◆쇄신 목소리 없는 소장파 의원들

70% 정도되는 한국당 초·재선 의원들이 보이지 않는다. 107명의 의원 중 초선의원이 43명, 재선의원이 30명이다. 이들의 존재감이 거의 없다. 대선 참패 이후 당의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올법도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위기국면에서 당의 쇄신을 요구하며 강력한 당내 투쟁을 벌였던 과거의 소장파와는 너무 달랐다. 지금은 바른정당에 있는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은 한나라당 쇄신파의 대명사였다. 이들은 당의 쇄신과 개혁을 주장하는 ‘미래연대’ 모임의 주역으로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당이 불법대선자금 수사로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자 연일 지도부와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면서 쇄신분위기를 주도했다. 이들이 10년이 지난 뒤에도 소장파로 불린 것은 그런 쇄신 이미지가 워낙 강하게 남아있어서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충청권의 한 중진의원은 “초·재선 의원들이 너무 약체다. 당이 이 같은 위기상황에 빠졌는데도 강건너 불구경하듯 한다”며 “과거 같으면 당이 서너번은 뒤집혔을 것”이라고 했다.

침묵해온 소장파가 지난달 31일 초·재선 연석회의를 시작으로 당 혁신방안 논의에 들어갔다. 박찬우 초선 간사는 “당의 뿌리부터 바꾸는 것을 초·재선의 힘으로 해내자는 부분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의 쇄신 목소리가 찻잔속의 태풍에 그칠지, 정풍운동으로 확산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흔들리는 보수 가치

“반성도 없고 책임도 안지는 무능한 보수의 모습이 바로 지금의 한국당이다.” 정치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당이 무기력증에 빠지면서 보수의 가치도 희미해지고 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국면에서 대통령 특보가 “우리가 나서 제재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도 무덤덤한 게 지금의 한국당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교수가 지난달 22일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스스로가 북한을 제재할 필요가 없다”며 금강산 관광·개성공단 재개 등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사실상 햇볕정책으로의 복귀를 공론화 한 것으로 해석됐지만 한국당에선 공식적인 논평조차 나오지 않았다. 대북정책은 보수와 진보가 10년 넘게 대립해온 이념적 가치의 문제다.

정진석 의원은 “법치주의와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 작은 정부 등은 양보할 수 없는 보수의 가치”라며 “한국당이 이를 토대로 새로운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당 주변에선 “보수의 가치가 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의원들이 적지않은 것 같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앞세워 골목상권 보호 등 각종 기업규제 정책을 밀어붙인 것이는 등 보수색깔이 희미해진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보수당의 미래는 있나

민주당엔 안희정 충남지사와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등 차기 주자들이 즐비하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선후보도 있다. 한국당엔 당장 떠오르는 주자가 보이지 않는다. 남경필 경기지사와 원희룡 제주지사는 탈당해 바른정으로 갔다.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기동민 의원, 하승창 사회혁신수석은 모두 서울시 정무부시장 출신”이라며 “사람을 키웠다는 의미로 한국당도 사람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당은 미래 정치인이 부족하다. 역설적으로 사람을 키우지 않았다는 의미다. 당내 구심점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차기 대선은커녕 당장 내년 지방선거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이 적지않다.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민주당 김부겸 의원과 김영춘 의원은 각각 대구시장과 부산시장을 노리고 있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자”는 장기집권 플랜을 추진하고 있다.

이재창 정치선임기자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