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수출 두 배 늘린 미국…OPEC 감산 합의도 안 먹혀
미국의 원유 수출이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조성한 시장질서를 파괴하는 게임 체인저로 떠올랐다. 미 셰일원유가 아시아와 유럽으로 밀려들면서 기존 산유국을 위협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비(非)OPEC 산유국인 러시아까지 견제하는 명실상부한 ‘오일 파워’로 등장했다고 분석했다.

1% 시장점유율로 가격 좌지우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올 들어 미국의 원유 수출량이 지난해의 두 배 수준인 하루평균 100만 배럴에 이른다고 8일 보도했다. 미 에너지부와 국제무역위원회(ITC)는 미국의 올해 원유 수출이 이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 4월까지 수출 물량은 총 1억1000만 배럴에 달했다.

미국의 원유 수출은 미 의회가 2015년 말 원유 수출 금지를 40년 만에 해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빗장’이 풀렸다. 이때부터 셰일원유 업계가 대대적인 증산에 나섰고, 텍사스 휴스턴은 미국 원유 수출의 전진기지로 급부상했다. 미국의 원유 수출량이 세계 원유거래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에 불과하지만 국제 유가를 배럴당 45~55달러로 묶어두기에는 충분하다고 WSJ는 분석했다.

세계 최대 원유 소비국인 미국은 지난해 하루평균 1000만 배럴을 수입했지만 셰일원유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올 들어 수입량이 급감했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은 미국의 원유 생산량이 계속 늘어나 내년에는 ‘하루 1000만 배럴 생산’ 고지를 찍을 것으로 내다봤다. 역대 최고인 1970년의 하루 960만 배럴 생산기록을 갈아치울 것이라는 예측이다.

생산량 확대는 재고 증가로 이어졌다. 이날 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이 5% 급락한 것도 예상과 달리 지난주 미국 원유 재고가 330만 배럴 늘어난 5억1300만 배럴을 기록했다는 발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에너지 성수기로 들어서면서 재고가 350만 배럴 감소할 것으로 기대하던 시장이 허를 찔린 셈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시장이 예상치 못한 미국의 원유 재고 증가에 완전히 당했다”며 “앞으로 재고가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마저 무너지면서 충격이 컸다”고 전했다. 올 들어 하루평균 180만 배럴 감산에 나선 OPEC을 비롯한 산유국의 공조도 무위에 그칠 공산이 커졌다는 전망이 나온다.

아시아·유럽으로 원유 수출 확대

석유 수출이 금지된 2013년 과잉생산된 미국의 원유는 90% 이상 정부의 특별허가를 받아 캐나다로 수출됐다. 하지만 금수조치 해제와 함께 캐나다 비중은 30%로 줄었고 대신 중국과 콜롬비아, 영국 등 30개 국가로 수출 지역이 다양해졌다. 캐나다를 제외한 미국의 원유 수출 시장은 아시아가 39%, 유럽이 22%, 중남미가 9%를 차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은 전통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앙골라 등 OPEC 회원국에서 절반 이상을 들여왔지만 올 들어 미국산 수입량을 전년 대비 20배 이상 늘리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중 무역적자 해소 의지도 이 같은 변화에 영향을 준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미국산 원유의 또 다른 강점은 가격이다. WTI는 영국 북해산 브렌트유보다 평균 배럴당 2.5달러 낮은 가격에 거래돼 장거리 수송에 따른 비용 부담을 낮춰주는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이점을 바탕으로 미국산 원유는 인도와 홍콩, 호주, 덴마크 등 다양한 수출 경로를 확보했다. 심지어 러시아의 안마당인 조지아조차 미국에서 올 들어 4월까지 12만 배럴의 원유를 수입했다. 인도 수입물량은 같은 기간 140만 배럴에 달했다.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 각국으로 원유를 공급하면서 관문 역할을 하는 이탈리아와 네덜란드도 미국의 원유 수출국에 이름을 올렸다. 유럽 최대 정유공장을 운영하는 네덜란드의 로열더치셸은 미국 셰일원유업계의 새로운 거래처로 등록됐다. WSJ는 지난 4월까지 유럽으로 수출된 미국산 원유가 2500만 배럴로 많지는 않지만 2005년부터 유럽에 원유를 수출해온 러시아에 새로운 도전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뉴욕=이심기 특파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