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선수가 꿈이던 소년
체육중학교 입학시험서 발 다쳐 포기
교사 조언으로 성악에 눈 떠…콩쿠르 전국 1위 후 이탈리아 유학
한국 가곡에 빠진 오페라가수
귀국 후 오페라 주역 도맡다…"가곡 알리자" 결심 후 순천 귀향
2006년엔 서울 나음아트홀 열어…우면산 수해로 피해 입기도…
매달 무료 클래식 '교류의 장'
예술의전당·금호아트홀 연주자들 '미리하는 음악회'로 관객과 만나
페북·인스타 친구 7700명인 아내, 'SNS 공연 홍보' 내조도 한 몫
한국가곡예술마을 나음아트홀에선 이렇게 한 달에 15~20차례 무료 클래식 공연이 펼쳐진다.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금호아트홀에서 공연 일정이 잡힌 연주자와 성악가들이 미리 찾아와 유료 공연과 똑같은 곡을 들려주는 일명 ‘미리 하는 음악회’다. 이날 박경화 바이올린 독주회도 11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트홀에서 입장료 2만원에 열리는 정식 공연에 앞서 무료 공연으로 이뤄졌다.
나음아트홀을 운영하는 장은훈 한국가곡예술마을 대표(56)는 “똑같은 곡도 연주자의 숨소리까지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에선 또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다”며 “연주자도 관객과 소통하고 공연 분위기를 미리 살펴볼 수 있어 좋아한다”고 말했다. 잘나가는 바리톤 성악가였던 그는 넉넉한 수입과 오페라단 부단장직 제의를 마다하고 30대 후반이던 2003년부터 전남 순천과 서울에서 무료 클래식 공연을 열고 있다. 올해로 14년째다.
촉망받는 성악가에서 무료공연 기획자로
“어릴 때만 해도 제가 성악가가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 했어요. 고향 순천에서 초등학교 6년 내내 육상선수를 했거든요.” 그는 6학년 때는 육상부 주장을 맡았고 광주체육중학교 입학 시험까지 보러 갔다. 그러나 시험장 흙바닥에 떨어져 있던 유리 조각이 그의 운명을 ‘육상선수 장은훈’에서 ‘성악가 장은훈’으로 바꿔놨다. 그는 “유리를 밟아 발이 몇 ㎝나 찢어지고 피가 줄줄 흘렀다”며 “결국 체육중학교 대신 순천에 있는 일반 중학교로 진학했다”고 했다.
그가 다닌 순천 매산중학교는 100여 년 전 미국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이다. 매주 의무적으로 예배를 하며 찬송가를 불러야 했다. “제가 변성기가 일찍 왔어요. 굵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음악 선생님이 너 목청이 좋다고, 성악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셨죠. 성악이란 분야를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성악 발성을 배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재능이 있었는지 특별히 과외를 받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때 나간 성악 콩쿠르에서 전국 1위를 하기도 했다. 이후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 1983년 한양대 성악과에 들어갔고, 이탈리아로 유학 가 베네치아 국립음악원을 최우수로 입학하고 졸업했다. 귀국 후에는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카르멘’ 등에서 주역을 맡는 등 여러 무대에 섰다. 대학원 강의도 나갔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2003년 그는 모든 일을 접고 고향 순천으로 갔다. 한국 가곡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노래를 처음 배울 때부터 우리말로 된 우리 가곡에 애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가곡이 잊혀져가고 외면받는 현실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항상 불편했습니다. 예술의전당처럼 한국 가곡에도 그런 기반이 되는 공연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천 시내에서도 차로 40분을 달려야 하는 문유산 자락(순천 승주읍 도정리)에 6만6120㎡ 부지를 구입해 한국가곡예술마을 한국가곡기념관을 세웠다. “많은 사람이 제게 집이 부자냐고 묻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돈이 없어 일부러 돌이 많은 땅을 골랐어요. 농사를 못 지어 버려진 땅이에요. 마을 사람들이 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했죠.”
해발 400m 고지대에 공연장인 한국가곡기념관과 연주자들의 숙소로 쓰이는 황토집이 자리하고 있다. 그가 직접 설계하고 인부들과 같이 땀흘려 지었다. 매달 한 번 ‘순천국제가곡제’를 여는데 10일에는 테너 김정규의 공연이 열린다. 장 대표는 “1부는 외국 가곡이지만 2부는 항상 한국 가곡을 부른다”고 했다. 폭우로 공연장 천장까지 물에 잠기기도
더 많은 사람에게 클래식과 한국 가곡을 알리기 위해 2006년 서울에 나음아트홀을 열었다.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앞 상가 지하였다. “건물주가 법조인 출신 할아버지였습니다. 계약할 때 천재지변으로 피해를 입을 경우 책임지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별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지나고 보니 그곳이 상습 침수지역이어서 그런 조항을 넣어두었던 거였죠.”
2011년 7월27일이었다. 집중호우로 우면산 산사태가 난 날이다. 우면산과 거리가 있는 대치동도 폭우로 물난리가 났다. 장 대표는 “공연장 천장까지 물이 찼다”며 “귀한 악기와 그림도 많았는데 모두 못 쓰게 됐다”고 말했다. 5억여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 아들은 대학에 못 보내고 군대에 먼저 보내야 했다.
나음아트홀은 그해 10월27일 지금의 개포동 국립국악고교 앞에 다시 문을 열었다. 피해를 본 지 3개월 만이었다. 선착순으로 주는 수재민 대출 5000만원을 받은 덕분이었다. 아들 의현씨는 지난 2월 이탈리아로 건너가 아버지가 다닌 베네치아 국립음악원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유학을 보내줄 형편이 아닌데 스스로 정보를 찾더니 워킹홀리데이로 이탈리아를 갔어요. 남들은 이탈리아어 배우러 어학원부터 다니는데 일하면서 배운다고 하니 대견하죠.” 첫째인 딸은 2년 전 나음아트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가곡예술마을 실장을 맡고 있는 부인 이종례 씨도 빼놓을 수 없는 조력자다. 다음 카페, 네이버 카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나음아트홀과 한국가곡기념관에서 열리는 공연 사진 및 후기를 올리는 일을 한다. 인터뷰 내내 장 대표 옆에 앉아 있던 이씨가 말했다. “제가 인터넷에선 좀 유명해요. 아이디가 ‘무대 뒤의예술가’예요. 페이스북 친구 5000명, 인스타그램은 2700명 정도 되죠.” 예술의전당 등에서 공연하는 음악인이 나음아트홀에서 무료 공연을 하는 이유도 이씨 덕분이란다. 장 대표가 말했다. “처음엔 공연을 앞둔 분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초청했어요. 지금은 먼저 여기서 공연하고 싶다는 분도 많아요. 작은 무대에서 먼저 공연하면 큰 무대에서 덜 떨게 되는 것도 있지만, 여기서 공연하면 아내의 SNS를 통한 홍보 효과가 크거든요.”
돈은 어떻게 벌까. 그는 “1시간에 10만원인 대관료 수입으로 겨우 세를 낸다”고 했다. 학생이나 음악 애호가들이 무대를 빌려 자기네 공연을 하는 경우다. 장 대표가 소정의 수업료를 받고 한국 가곡을 가르치는 마스터클래스 수업이나 아마추어 가곡 애호가들이 피아노 반주비 명목으로 한 사람당 5만원을 내고 2곡씩 부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장 대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클래식을 통한 좋은 문화 가꿔가기’라고 표현했다. “클래식 공연계가 화려해 보이지만 유명 공연 빼고는 객석 채우기가 힘듭니다. 당장 경제가 어려워지면 애들 피아노 학원부터 끊는 게 현실이고요.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공연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어요. 설 자리가 많이 없는 연주자들도 상처가 많아요. 좋은 연주자들이 관객과 더 많이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싶습니다.”
우리네 얼이 서린 '한국 가곡'
피아노 반주에 시의 가사, 한국의 정서·문화 담겨…창법 개발 등 부흥 '움직임'
가곡은 피아노 반주에 시(詩) 등에서 따온 가사를 붙여 부르는 노래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최초의 형태가 나타났지만 서양에서도 가곡이 널리 불려진 것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로베르트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 등이 활동한 19세기 낭만주의 시대가 되어서였다.
한국 가곡은 1920년대에 나타났다. 1922년 작곡된 박태준의 ‘동무생각’이나 1925~1926년 사이 발표된 홍난파의 ‘봉선화’가 한국 가곡의 효시로 꼽힌다. 이후 김동진의 ‘가고파’, 채동선의 ‘고향’ 같은 가곡이 나오면서 한국 가곡의 발전을 이끌었다.
한국 가곡은 서양식 멜로디를 따르지만 가사에 한국인의 한과 얼이 서려 있어 일제강점기와 남북 분단 등 힘든 시기를 보내던 사람들의 마음을 매만져줬다. 1981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MBC 대학가곡제’가 열리는 등 가곡의 대중적 인기는 계속됐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분위기가 바뀌어 한국 가곡을 부르는 일이 진부한 일로 치부됐다. 정부의 교육 정책에 따라 여러 학교가 음악을 선택제로 바꾸면서 어릴 때 한국 가곡을 접할 기회도 줄었다.
장은훈 한국가곡예술마을 대표는 “가곡은 서양에서 탄생했지만 노랫말로 한국의 정서, 철학, 문화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며 “좋은 가곡은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윤선도의 시조에서 노랫말을 딴 ‘오우가’ 등 100여 편의 한국 가곡을 작시·작곡했다. 청소년 가곡인 청가(靑歌), 우리 구강 구조에 맞게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창법인 본이가(本吏歌)도 개발했다.
장 대표는 “시를 읊는 것도 좋지만 음악을 입히면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다”며 “사람들이 아름다운 노랫말과 선율로 만든 가곡을 많이 불렀으면 좋겠다”고 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