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베르나우어 거리에는 베를린 장벽을 상징하는 쇠기둥이 남아 있다. 건물 외벽에는 냉전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이 붙어 있다.
독일 베를린 베르나우어 거리에는 베를린 장벽을 상징하는 쇠기둥이 남아 있다. 건물 외벽에는 냉전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이 붙어 있다.
지난달 18일 독일 베를린 베르나우어 거리. ‘죽음의 띠’라고 불리던 베를린 장벽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니 철조망 사이로 1만2000㎡ 규모의 거대한 폐공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장 주변에는 베를린 장벽을 기억하기 위해 남겨 놓은 쇠기둥이 줄지어 서 있었다. 19세기 양조장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뒤 방공호로 사용됐다. 베를린 장벽에서 동독 지역으로 향할 때 만나는 첫 번째 장애물로, 서독 군인들의 감시를 차단하는 ‘또 하나의 장벽’ 역할을 했다. 동독 군인들은 이곳 망루에서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을 감시했다.

이날 방문한 폐공장은 전쟁의 삭막함 대신 유럽 전역에서 몰려온 젊은 창업가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2011년 ‘팩토리 베를린’이라는 이름의 벤처 창업 단지가 생기면서다. 우버, 트위터, 사운드클라우드 등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기업들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운동장에서 개를 산책시키고, 침대에 누워서 업무를 보거나 탁구장에서 토론하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작은 실리콘밸리에 온 듯했다.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이 뒤섞여 이곳이 독일인지도 잊게 했다. 벽면에는 오픈소스 운영체제(OS)인 리눅스를 개발한 리누스 토발즈의 말이 적혀 있었다. “여우처럼 게으름을 피워라(lazy like a fox).”

폐허에서 피어난 창업가 정신

지난달 18일 독일 베를린 스타트업 창업단지 ‘팩토리 베를린’에서 창업자들이 소파에 누워 작업하고 있다. 독일 분단 당시 ‘방공호’로 쓰였던 폐공장이 스타트업 창업자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고재연 기자
지난달 18일 독일 베를린 스타트업 창업단지 ‘팩토리 베를린’에서 창업자들이 소파에 누워 작업하고 있다. 독일 분단 당시 ‘방공호’로 쓰였던 폐공장이 스타트업 창업자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고재연 기자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poor but sexy city)’라고 불리는 베를린이 유럽의 ‘스타트업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 전역에서 모여드는 인재, 저렴한 물가, 자유분방한 문화가 젊은 창업자들을 베를린으로 끌어당겼다. 베를린 주정부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제조업 강국으로 꼽히는 독일이 ‘인더스트리 4.0’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스타트업 엔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조업 중심 국가인 독일은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과 거리가 먼 나라였다. 특히 베를린은 독일의 정치적 수도일 뿐 산업·경제적으로는 동서독 통합 이후에도 별다른 기반이 없었다. 2001년 베를린시장이 된 클라우스 보베라이트는 전략적으로 ‘예술 도시’를 표방했다. 도시는 달라졌다. 수많은 갤러리가 생겼고, 길거리를 캔버스 삼아 그린 그라피티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통일 후 쓸모없어진 공장과 우중충한 노후 주택이 예술가들의 손을 거쳐 새로 태어났다. 팩토리 베를린을 비롯해 ‘베타하우스’ ‘마인드 스페이스 베를린’ 등 스타트업을 위한 공동 작업 공간도 생겨났다. 크리스토프 마리 전 사운드클라우드 이사는 “처음에는 예술가들이, 그다음에는 DJ들이, 그다음에는 창업자들이 베를린으로 몰려왔다”고 설명했다.

이탈리아 출신 창업가 루제로 페르티니 말가리니(26)는 런던경영대를 졸업한 뒤 지난해 10월 이곳으로 왔다. 팩토리 베를린에 둥지를 튼 그는 동료 세 명과 패션 동영상 플랫폼 ‘보보(BOBO)’를 준비 중이다. 사무실 한 달 이용료는 단돈 50유로. 그는 “저렴한 임대료, ‘쿨’한 사람들, 스타트업 네트워크를 고려할 때 베를린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18일 독일 베를린 스타트업 창업단지 ‘팩토리 베를린’에서 창업자들이 소파에 누워 작업하고 있다. 독일 분단 당시 ‘방공호’로 쓰였던 폐공장이 스타트업 창업자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고재연 기자
지난달 18일 독일 베를린 스타트업 창업단지 ‘팩토리 베를린’에서 창업자들이 소파에 누워 작업하고 있다. 독일 분단 당시 ‘방공호’로 쓰였던 폐공장이 스타트업 창업자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고재연 기자
투자도 늘어났다. 회계컨설팅업체 언스트앤영에 따르면 2015년 베를린에 있는 스타트업이 받은 투자금 규모는 21억5000만유로(약 2조7500억원)로 런던(17억7000만유로)을 제쳤다. 온라인 음악 유통 플랫폼인 사운드클라우드, 음성 인식 모바일뱅크 N26, 스타트업 인큐베이팅 업체 로켓 인터넷, 소셜게임 개발업체 우가 등이 이곳에서 탄생했거나 본사를 두고 있다. 최근에는 온라인 예술경매업체 옥셔나타, 음식배달 서비스 업체이자 ‘요기요’와 ‘배달통’의 최대주주인 딜리버리 히어로, 의류 큐레이션 서비스 업체 아웃피터리, 과학자를 위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리서치게이트 등의 스타트업이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섞여 있다는 것도 강점이다. 베를린은 180여 개국에서 온 이방인이 모여 산다. 도이처 스타트업 모니터가 2016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를린 스타트업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의 42%는 독일인이 아니다.
“런던 스타트업, 베를린으로 오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선언도 베를린에는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브렉시트 선언 직후 독일 자유민주당이 런던 한복판에서 “스타트업들, 동요하지 말고 베를린으로 오라(dear start-ups, keep calm and move to Berlin)”는 버스 전면 광고를 내보냈다가 논란이 됐을 정도다. 코르넬리아 이처 베를린시정부 경제장관은 지난해 7월 “베를린은 브렉시트가 제공한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라며 “본사 이동을 고려하고 있는 기업들은 유럽의 중심지에 있어야 하는 기업이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를 가진 수도가 아니라면 어디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독일 정부도 창업가들에게 대출 혜택과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창업교육을 활성화하고, 이민자에게 취업을 알선하는 대신 창업을 독려한다. 독일 연방 재무부는 지난해 스타트업 육성을 위해 100억유로(약 12조원)의 예산을 추가 편성했다.

핀테크(금융기술) 위주인 런던과 달리 베를린은 IT는 물론 패션, 음악, 음식, 자동차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이 성장하고 있다. 루카스 캄프만 팩토리 베를린 공동창업자는 “독일 스타트업의 미래는 우리가 가진 제조업 기반에 사물인터넷(IoT)을 결합하는 분야에 있다”며 “대기업에 스마트팩토리 솔루션을 제공하는 소프트웨어 및 맞춤형 서비스 제공업체 릴레이어(relayr)가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베를린=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