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가계부채 탕감의 전제 조건
미국 속담이 있다. 누구를 괴롭히고 싶으면 그 사람 돈을 빌려서 갚지 말라는 것이다. 돈을 빌려줬는데 받지 못하는 것은 돈을 도둑맞은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준다. 채권과 채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과 달라서 중간에 매개체가 없고 바로 감정 문제가 된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면 돈도 잃고 친구도 잃는다는 말이 그 때문에 생긴 것이다.

경제가 커지면서 금융회사가 등장했고 돈 문제는 간접적인 문제가 됐다. 중간에 금융회사가 끼면서 덜 감정적이 된 것이다. 이로써 가혹행위도 줄어들었지만 돈을 갚지 않는 것도 친구에게가 아니라 돈 많은 금융회사에 안 갚는 것이 돼 부채 감각이 무뎌졌다.

채무 불이행은 지금은 민사 문제지만 역사적으로는 형사 문제였다. 옛날에는 돈을 안 갚는 채무자에게 채권자가 폭력을 행사하거나 국가가 체벌을 가했다.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살 한 파운드를 베어내려고 했다. 판사는 피를 흘리면 안 된다고 했지 살을 베어내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기원전 5세기 로마에서는 판결이 확정되고 30일의 유예기간이 지나면 채권자가 채무자를 살해하거나 노예로 팔 수 있게 했고, 채권자가 여럿인 경우 채권액수에 따라 채무자의 신체를 절단해서 나누도록 하는 야만적인 법률이 있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돈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것을 허용하는 이런저런 제도가 시행된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역사적으로 채무 불이행에 체벌을 가한 적이 없다. 미국은 오히려 회생제도를 통해 파산과 새 출발을 쉽게 해준다. 우리는 미국 제도를 수입한 셈이다. 미국에서 유래한 회생제도는 모험적인 창업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다. 즉 기업가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미국에서도 실제로는 파산제도가 단순 채무의 탕감에 더 많이 활용되고 있어서 문제다.

미국의 제도는 미국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흔히 양키(Yankee)라고 불리던 뉴잉글랜드 식민지 사람들은 종교적인 요인이 컸겠지만 어떤 책에서 쓰고 있듯이 “검소하고 근면하며 고통을 느끼면서도 비리를 피하는 훌륭하고 쓸모 있는” 사람들이었다.

1620년 플리머스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기아에 허덕이면서도 인디언 부락에 방치된 옥수수를 함부로 가져가지 않았다. 반드시 뭔가를 대가로 두고 가져갔다. 순례자들은 좁은 배 안에서 물과 비스킷만으로 석 달을 버티면서 신대륙에 간 강인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도착 첫해 겨울에 절반이 사망했다. 그런 혹독한 환경에서도 염치를 잃지 않았고 서로를 돌보는 헌신적인 형제애로 살아남았다. 이 정신은 아직도 미국인들의 품성과 문화에 남아 있다.

새 정부가 부채 탕감 기준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흔히 부채 탕감에 따르는 도덕적 해이 문제를 말하지만 탕감 대상자들은 사회적 취약계층이므로 대상자의 도덕적 해이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부채 탕감은 사회 전반의 도덕 수준이 높고 사회 구성원에게 확실한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부채 탕감이든 복지든 내가 받는 혜택은 공동체 내 누군가의 재산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누군가의 재산은 노동과 절약과 절제로 형성된 것이다. 남의 돈을 쉽게 아는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정부의 부채 탕감 계획 기사에 대해 인터넷에 가장 많이 올라온 댓글은 그러면 어려워도 착실하게 돈을 갚는 사람들은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이 여론에 경제학을 들어 설명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 부채 탕감은 가계빚 문제가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심정적인 문제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심지어 가족 간에도 서로 각박해지고 있는 사회다. 부채 탕감에 앞서 염치와 절제를 아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조건이 무엇인지도 생각해야 한다.

김화진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hjkim7@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