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가로 자수성가한 김모씨(72)는 치매 초기 진단을 받고 고민에 빠졌다. 중증 치매로 접어들기 전 증여와 상속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내에게 재산의 50%를 남기고 25%는 자녀들에게, 나머지는 모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고 싶지만 걱정이 있었다. 자산관리를 해본 적이 없는 아내에게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주변의 꼬임에 속아 평생 일군 자산을 한순간에 날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유언대용신탁'에 꽂힌 자산가들
김씨는 유언대용신탁 서비스를 활용해 자신이 사망하면 재산의 절반가량인 수익형 부동산을 아내에게 넘겨주되 아내가 사망하기 전까지는 처분하지 못하도록 조건을 걸었다.

김씨처럼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해 가족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거액자산가가 늘고 있다.

대표 상품은 지난 1월 신영증권이 내놓은 ‘패밀리 헤리티지 서비스’다. 개별 고객 맞춤형으로 신탁을 설계해주는 서비스다. 고객 생전에는 신영증권의 장기·가치투자 철학에 맞춰 자산을 운용하고 사후에는 미리 정한대로 상속을 집행한다. 상품 가입 전 변호사 세무사 자산관리전문가 등과 함께 세 번 이상 상담을 거친다. 고객마다 보유 자산의 규모와 종류, 원하는 상속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영표 신영증권 신탁부장은 “10억원 이상 금융자산을 보유한 70~80대 자산가가 주로 가입한다”며 “최근에는 재산을 물려줄 곳이 마땅치 않은 40~50대 독신 고객도 돌연사에 대비해 자산 용처를 정해놓으려는 문의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대신증권과 하나금융투자도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준비하고 있다.

거액자산가들이 유언대용신탁을 찾는 이유는 원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증여·상속할 수 있어서다. 유언을 남겨 재산을 상속하면 상속자산이 사후 한꺼번에 넘어간다. 하지만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해 다양한 조건을 걸면 원하는 시점에 자산을 나눠 상속할 수 있다.

사후에 유언이 확실히 이행된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대부분 유언장을 작성해 상속을 결정하지만 이 경우 불확실성이 작지 않다. 유언장이 법적 효력을 가지기 위한 요건이 엄격하기 때문이다. 자필 작성 여부, 날짜, 주소, 날인, 증인 등 한 가지 요건만 만족하지 못해도 유언은 무효가 돼 뜻대로 상속이 이뤄지지 않는다. 신탁을 설정하면 자산 소유권이 증권사로 넘어가고 증권사는 계약에만 따르기 때문에 신탁자의 뜻이 그대로 이행된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유언대용신탁 시장은 빠르게 성장할 전망이다. 오 부장은 “국내 유언대용신탁 시장은 아직 걸음마 단계”라며 “시장 성장세가 가파른 만큼 2020년이 되면 유언대용신탁 시장 규모가 연간 상속·증여 자산의 10% 수준인 2조원 규모로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패밀리 헤리티지 서비스는 상품 가입 때 컨설팅 수수료로 일정 금액을 정액으로 받는다. 이후 맡긴 자산 규모에 비례해 운용 수수료를 뗀다.

■ 유언대용신탁

고객이 살아있을 때는 금융회사가 고객의 자산을 운용하고 사후에는 상속인(수익자)에게 유산을 지급하는 신탁 상품.

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