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동의 가격의 비밀] 가뭄의 경제학…'자몽'주스 마시며 '김장' 걱정
올 들어 계속되는 가뭄 탓에 정부와 농가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야말로 하늘만 쳐다보는 상황인데요. 정부는 이번 추가경정예산에 가뭄 피해 예산을 추가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가뭄은 자연재해이기도 하면서 대규모 경제적 피해를 야기하는 국가적 재난입니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역대 최악의 가뭄으로 꼽히는 1967~68년 가뭄은 피해액만 1조3000억원에 달했습니다. 피해면적도 48만ha에 이릅니다. 여의도 면적의 1650배죠. 당시 대한민국 1인당 GDP(국민총생산)가 157달러에 불과했으니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의 피해였습니다.

가뭄이 소비자들에게 피부로 와닿는 경우는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을 초래할 때입니다.

애그플레이션이란 농업을 뜻하는 '어그리컬쳐'(Agriculture)와 화폐가치 하락으로 물가가 전반적이고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인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말로 농산물 가격 상승이 원인이 돼 나타나는 물가 상승을 뜻합니다.

가뭄은 농작물 생육은 물론 파종(씨를 뿌리는 것)과 모종(옮겨심는 것)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쳐 장·단기적으로 식탁 물가에 영향을 줍니다.

국내의 경우 지금 파종해 보통 90일 뒤에 거둬들이는 고랭지 배추의 경우 당장 땅이 메말라 씨를 뿌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몇 개월 뒤면 가격이 급등할 수 있죠. 올해 김장철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요.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에 따르면 지난해 강원지역에 나타난 봄 가뭄으로 인해 고랭지 배추 가격이 평년보다 3배 가까이 뛴 포기당 1만5000원에 달했습니다.

땅이 거북이 등껍질 처럼 갈라진 탓에 파종 시기가 늦어지고 무름병 등 병충해 피해가 왔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고랭지 배추 주산지의 일별 최고기온 기록을 보면 강원도 삼척의 경우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일주일 연속 지속되는 등 기후가 배추 생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자연스럽게 배추 출하량이 줄면서 가격은 크게 뛰었죠.

식품기업 대상이 지난해 10월 30, 40대 주부 100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47%가 '김장을 하지 않겠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배추의 가격이 크게 오른 것뿐만 아니라 김장의 부재료인 무, 대파, 양파 등도 가뭄으로 인해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뭄은 6월 즈음 수확해야 할 감자, 양파, 오이 등의 물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전날 가락시장에서 거래된 만생 품종의 양파 가격(20kg, 특품 기준)은 2만167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8% 뛰었습니다. 가뭄 피해 탓에 출하량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봄 가뭄'이 지속돼 '여름 가뭄'으로까지 이어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채소파동 가능성 때문입니다.

상추, 고추, 시금치 등 일반 서민들이 즐겨먹는 채소들은 적당한 일조량과 일교차 같은 생육 환경이 중요한데 가뭄으로 인해 일조량이 과도하게 높아지면 수확량이 급감합니다.

일반적으로 상추, 시금치, 깻잎 등 잎채소는 기온이 22~24도일 때 가장 잘 자랍니다.

가뭄 여파로 농수산물 구매에 부담을 느끼는 소비자들을 위해 기업들은 비축해놨던 물량을 대거 방출하고 있습니다.

이마트는 전날부터 양파, 감자, 무 등을 각각 기존 판매가 대비 21~37% 낮춰 판매한다고 발표했죠.

애그플레이션은 정치·사회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비축 물량을 풀어 가격 조정에 나서기도 합니다. 전체 소득에서 식료품 지출 비중이 큰 저개발 국가 국민에게는 생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곡물 가격이 가파르게 올랐던 2008년 필리핀·멕시코·인도네시아 등에서 비싼 식료품 가격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이나 중동 국가는 농산물 가격 상승으로 물가가 함께 오르는 애그플레이션 현상을 자주 겪습니다.
<한경DB>
<한경DB>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가뭄이 의도하지 않은 곳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경우입니다.

가뭄은 물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경우를 말하는데, 보통 물 부족은 강수량 부족에서 출발합니다. 강수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비오는 날보다 해가 쨍하게 뜬 날이 많다는 얘기이고 이는 풍부한 일조량으로 이어집니다.

주스와 빙수로도 많이 즐기는 오렌지, 자몽, 복숭아 같은 과일은 일조량이 풍부할수록 생산량이 많아지고 당도도 높아집니다.

이날 가락시장에서 거래된 자몽가격은 미국 수입산이 1kg당 2188원(특품), 남아프리카공화국산이 2400원(특품)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18%, 35% 떨어졌습니다.

이는 현재 자몽의 주산지인 아프리카와 미국 플로리다에 불어닥친 가뭄 여파로 일조량이 크게 늘면서 자몽 출하량이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은 100년 내 최악의 가뭄으로 댐 수위가 10% 이하로 내려가 시민들의 1인당 하루 물 사용량을 100L 이하로 줄이는 조치를 시행 중입니다. 미국 플로리다도 가뭄으로 인해 물이 부족하자 주민들의 세차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가뭄이 와서 좋은 점이 또 있을까요. 모기를 유난히 싫어하는 사람들은 가뭄이 마냥 나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가뭄으로 모기 서식지가 줄어 개체수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름 불청객인 모기 소식, 올 들어 별로 들어본 일이 없죠.

2015년 가뭄 당시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그해 4~10월 사이 감시 체제를 통해 채집된 모기 개체수는 1만6830마리로, 평년(2001~2014년) 같은 기간의 개체수 대비 23.9%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질병관리본부는 가뭄에 의한 서식지 감소를 원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그해 G마켓에 따르면 7월 모기 방충망과 살충제 판매량이 전년과 비교해 11%, 모기방지팔찌와 모기기피제는 각각 20%, 9%씩 감소했습니다. 모기방지제품을 판매하는 기업들은 어쩌면 또 다른 이유에서 가뭄이 반갑지 않을 수 있겠군요.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