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이 한양을 점령한 다음날인 1592년 6월13일(음력 5월4일). 이순신은 휘하 수군을 이끌고 여수를 출발했다. 전투선은 판옥선 24척과 협선 15척이 전부였다. 비전투용 어선인 포작선 46척이 뒤를 따랐다. 고성에서 자고 통영 당포 앞바다에서 원균과 합류한 건 6월15일이었다. 원균은 판옥선 1척을 타고 나타났다. 이어 다른 장수들이 판옥선 3척과 협선 2척을 타고 와 합세했다. 원균은 이미 100여 척을 잃은 뒤였다.

다음날 정찰대가 거제 옥포에서 왜선 함대를 발견하고 신기전(로켓 추진 화살)을 쏘아 본대에 알려왔다. 이순신은 심호흡을 한 뒤 군사들에게 명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 두려움에 떨지 말고 냉철하고 지혜롭게 싸우라는 당부였다. 옥포 선창에는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왜선 50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배에서 내려 노략질에 여념이 없던 왜군은 이순신의 기습에 혼비백산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적선 6척이 조총을 쏘며 달려 나왔다.

그러나 조총의 사거리는 100m에 불과해 300m에 이르는 조선 수군의 대포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순신은 퇴로를 봉쇄하고 포격을 퍼부으며 적선을 깨부쉈다. 순식간에 왜선 26척이 격침됐다. 겨우 탈출한 건 몇 척에 불과했다. 아군 피해는 한 척도 없었다. 전사자도 없었다. 가벼운 부상자만 한 명이었다.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이자 ‘23전 23승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날 혼쭐이 난 적장 도도는 몇 년 뒤 정유재란 때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에게 다시 대패해 31척을 잃었다.

우리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떨던 그들이었다. 전투가 무서워 탈영한 병사 한 명을 군법으로 다스려 목을 베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첫 전투에서 이긴 이들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쳤다. 민간인 신분으로 참전한 백성들도 큰 공을 세웠다. 이날 승리의 여세를 몰아 마산 합포 앞바다의 왜선 5척과 고성 적진포의 왜선 11척까지 격파했다.

이순신이 옥포해전에서 승리한 그날, 피란길의 선조가 평양에 막 도착했다. “명나라로 도망가겠다”는 선조를 류성룡이 평양에 머물도록 극구 만류하는 동안 이순신이 올린 첫 승전보가 도달했다. 이를 계기로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 수군은 호남 곡창지대를 보호하고 왜군의 보급로를 끊으며 전세를 바꿔 놨다.

당시 해전의 무대에는 대우조선소와 옥포여객터미널이 들어서 있다. 오늘부터 이틀간 이곳 일대에서 425년 전 그날을 기리는 옥포대첩기념제전이 열린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