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 윤곽이 잡혀간다. 중심은 ‘경제민주주의’라는 경제적 평등이다. 이거야말로 인간다운 경제체제의 이상(理想)이라고 문재인 정부는 국민을 유혹한다. 경제적 불평등이 저성장, 실업 등을 초래했고 오늘날의 위기는 경제적 불평등의 위기라는 믿음에서 경제적 평등을 국정철학의 중심에 세운 것이다.

소득격차는 타인의 희생 결과이기에 시장분배는 근본적으로 공정하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부자가 돈으로 정치를 매수해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으로 재생산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국정철학은 문제투성이다. 우선 최저임금 인상,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해소 등 문재인 정부가 쏟아내는 정책을 보면 특정 계층을 위해 ‘불특정 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정부가 기업인, 납세자, 시민을 특정 부류의 복지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겠다는 게 경제적 평등의 전략이다. 인간을 도구 취급하는 것은 존엄성을 유린하는 것이라는 칸트의 말을 잊었는가! 인간가치를 값싸게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긍심을 농락하는 경제적 평등체제가 어떻게 인간적이란 말인가.

경제적 평등체제는 ‘정치적 평등’까지도 유린한다. 정치적 평등이란 지위, 재산, 소득, 출신 등에 따라 정부는 법·재정·금융 등 어떤 특권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법치의 정치철학적 개념이다. 정치적 평등은 비대한 국가권력 때문에 자유가 상실됐던 시기에 권력의 원천·성격에 관한 논쟁에서 생겨난 자유주의 이상이다. 정의 규칙을 통해서 모든 개인들에게 똑같이 자유·재산을 보호하는 게 국가의 정당한 과제다.

국가권력은 늘 위태롭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권력제한을 극도로 중시하는 게 법치의 정치적 평등이다. 그러나 경제적 평등체제는 값비싼 경험을 무시하고 국가권력을 무제한으로 허용하는 사회주의다. 정치적 평등체제야말로 기업인, 시민, 노동자, 납세자 등 누구도 목적 자체로 여기는, 그래서 인간다움을 보장하는 체제다. 누구에게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기회가 폭넓게 열려있는 것도 자유사회다.

자본주의를 생산이 없는 영합(零合)게임으로 보고 경제적 불평등이 타인을 희생한 필연적 결과라는 문재인 정부의 인식도 틀렸다. 가치 창출이 없으면 소득도 없는 게 자유시장이다. 문재인 정부는 시장의 분배결과에 대해 정의·불의를 따지는 데 이것도 틀렸다. 개인들이 정의의 규칙을 지키면서 번 소득에서 격차가 생겼다고 해서 이를 도덕적으로 따지는 건 애초에 지켰던 행동규칙의 정의를 부정하는 결과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지적하듯 경제적 평등의 원천은 부족·혈연의 소규모사회에서 잘 적응됐던 ‘석기시대’의 산물이다. 생산이 없었던 원시사회의 척박한 삶을 극복하고 번영하는 문명사회로 이끌어 온 건 시장도덕이었다.

경제민주주의 국정철학은 열린사회를 원시사회로 되돌리는 사상이다. 결과는 비극이다. 타인의 희생으로 누군가의 복지를 증진하는 게 경제적 평등체제이기 때문에 순수한 경제적 생산이 점차 어려워지고 정치적 줄대기가 돈벌이의 유일한 길이 된다. 통치엘리트 이외에는 모두가 가난해지는 게 경제적 평등을 내건 사회주의라는 걸 왜 잊었는가! 오늘날 경제위기도 경제적 불평등의 탓이 아니라 친(親)노동정책, 선심성 복지, 대기업 규제 등 역대 정부가 특정그룹을 위해 국민 모두를 희생자로 만든 정치적 불평등의 결과다.

부자, 대기업이 돈이 많아서 정치시스템을 왜곡한다는 이유로 소득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문재인 정부의 논리도 틀렸다. 개인, 조직이 정부에 영향을 미치려는 노력은 자의적 간섭을 허용하는 무제한적 권력 때문이다. 자유주의철학이 권력제한을 중시하는 것도 그래서다. 정부권력의 확대를 부르는 경제적 평등에서 문재인 정부가 의존하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소통·숙고정치(숙고민주주의)는 권력제한의 미봉책일 뿐이다. 현실적합한 건 자유를 위한 제한적 민주주의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철학은 ‘노예의 길’이다. 우리의 길은 자유, 법치, 제한적 정부의 정치적 평등이다. 이것이야말로 번영의 길이다.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