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통찰(perspicacity)’ 속에서 화가는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을 보면서 캔버스엔 날갯짓하는 새를 그리고 있다. 경영학자들은 초현실주의 마그리트의 이 그림을 ‘현상을 통찰하는 능력’으로 해석한다.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 추경과 관련해 경제가 ‘재난상황’ ‘비상사태’라고 말한다. 경제가 어느 날 돌변한 걸까. 아니면 야당 땐 몰랐다가 집권하니 알게 됐다는 말인가. 극단적 용어가 쏟아진다는 건 미래 가치 할인율이 크게 높아졌다는 얘기다. 이리되면 미래에 벌어질 일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근시안적 의사결정’ ‘미루기’ ‘인지부조화’ ‘공유지의 비극’ 등은 그 필연적 결과물이다.

누가 몰라서 안 하는 것도 아닌, 가장 손쉬운 방법인 ‘공무원, 공공부문 일자리 늘리기’만 해도 그렇다. 10년, 20년, 30년 뒤 눈덩이처럼 불어날 미래 부담은 안중에도 없다. 민간부문 고용 왜곡이나 미스매치 심화 우려 등엔 아예 눈을 감아 버린다.

역사가들은 산업혁명 당시 ‘러다이트(기계파괴 운동)’를 비웃는다. 하지만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정확히 알았다. 다만 ‘내일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공격 포인트를 잘못 잡았을 뿐이다. 극단적으로 높은 미래 할인율이 문제였다.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지금 한국은 어떤가. 세계경제포럼(WEF)은 “2020년까지 전 세계 고용의 65%를 차지하는 주요 15개국에서 새로운 일자리 200만 개가 창출되는 반면 기존 일자리는 710만 개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전망의 정확성은 둘째 문제다. 국가의 미래 포지션에 따라 일자리 대체 정도가 달라질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영국 옥스퍼드대 마틴스쿨의 칼 베네딕트 프레이와 마이클 오즈번은 논문 ‘고용의 미래’(2013년)에서 노동시장의 ‘불연속성’을 주장했다. “19세기 생산기술이 ‘숙련노동의 대체’를 가져왔고 20세기 컴퓨터 혁명이 ‘중간소득 일자리의 공동화’를 초래했다면, 21세기는 양극화 노동시장에서 ‘하위 저숙련의 절단’을 낳을 것”이라고. 근로자는 지금이라도 창의적·사회적 지식으로 무장하라는 메시지가 한국엔 얼마나 먹혀들고 있나.

정부 스스로도 4차 산업혁명으로 기존 일자리 소멸, 새로운 직업군 탄생, 직업의 성격 변화 등 미래 노동시장이 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행동은 정반대다. 다양한 계약직이 정규직을 대체할 거란 ‘온디맨드’ 경제를 주장하면서 ‘비정규직 제로(0)’를 강제하는 식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인간의 교환 본능에 따른 분업은 자본축적과 함께 번영의 일반원리라고 주장했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분업으로 경제는 더 복잡해지고 직업 수는 훨씬 많다. 정부의 노동분업 규제는 거꾸로 가는 행동이다.

미래 할인율이 높은 정부에서는 ‘일자리 영향평가’도 위험하다. 눈에 보이는 현재 일자리는 과대평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 일자리는 과소평가하기 십상이다. 모바일 거래 급증으로 은행·증권·보험 등 금융인력이 지난해 말 39만5775명으로, 2012년 말 대비 8033명 줄었다고 호들갑 떠는 걸 보라. 고비용·저효율 인력에 집착하는 한 핀테크(금융기술)는 끝이다. 누구는 ‘은산분리’를 탓하지만 높은 미래 할인율과 강한 규제는 한편이나 다름없다.

선진국은 동틀 녘에 상황판 걸어놓고 미래 일자리를 고민하는 모습이다. 한국만 해 질 녘 서산에 상황판 내걸고 사라질 일자리로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끝내자는 건 아닌지. 벌써부터 고용시장의 급격한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비록 ‘노동 등 구조 개혁이 없다면’이란 전제를 달긴 했지만 다음 대통령은 ‘성장률 제로’에서 출발할지 모른다는 전망과 함께.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