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방경찰청 소속 한 채증 담당 경관이 2015년 12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집회 현장을 촬영하고 있다. 한경DB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한 채증 담당 경관이 2015년 12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집회 현장을 촬영하고 있다. 한경DB
“앗, 드론(무인비행기)이다. 고개 숙여.”

때는 2021년 6월 어느 날.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 집회에 참석한 여대생 A씨(25)는 초고화질 카메라를 실은 경찰 드론이 머리 위로 날아오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더운 여름날에도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마스크까지 착용했지만 만에 하나 얼굴이 찍힐까봐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경찰이 개발 중인 치안용 드론이 집회 현장에서 ‘채증’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를 가정한 시나리오다. 경찰청은 올해 미래창조과학부 산업통상자원부 등과 함께 2020년을 목표로 치안용 드론 개발에 나섰다. 이를 위해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에 ‘경찰 활동에서 드론 활용방안과 그 법적 문제 용역’을 발주하기도 했다. 제안 요청서에는 ‘집회 시위에 대한 대응으로 경비·정보 활동에서 드론의 활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측은 현 시점에서 일단 치안용 드론을 집회·시위 현장에 사용할 계획은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채증 활동 자체에 대한 논란이 더욱 가열되는 모습이다.

법적 근거 없는 경찰 채증 활동

[경찰팀 리포트] 찍어도, 안 찍어도 문제…'인권 경찰'의 채증 딜레마
경찰의 채증 활동을 둘러싼 논란은 과거부터 계속돼왔다. 우선 법적 근거부터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현재 경찰 채증의 근거는 경찰청 예규 제495호 ‘채증활동규칙’이다. 예규는 일종의 행정규칙으로 법령과는 다르다. 이준일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찰청 예규는 경찰이 내부적으로 정한 자체 규정에 불과하다”며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아 채증의 범위, 관리 등에 대한 규정이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광범위하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2014년 집회에 참가했다가 채증을 당한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재학생 네 명이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들이 청구한 헌법소원은 지금까지도 심리 중이다. 청구인 네 명 중 한 명인 이종훈 변호사(30)는 “법적 근거 없이 채증이 이뤄지는 현실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며 “당시 촬영된 청구인들의 사진 혹은 영상이 현재도 남아있는지,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확인할 방도가 전혀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문제 제기가 이어지자 2015년 경찰청은 채증활동규칙을 개정했다. 채증의 개념을 ‘불법 또는 불법이 우려되는 상황에 대한 녹화·녹음’이라고 규정했던 데서 ‘불법 또는 이와 밀접한 행위를 녹화·녹음’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채증 시점도 불법 행위 직전부터 가능하도록 명시했다. 하지만 의무경찰을 채증 요원에 포함시키고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 스마트폰 등 개인 장비를 이용해 채증할 수 있다는 내용이 추가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경찰 내부에서도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채증 요원으로 근무했다는 한 경찰관은 “집회에서 채증을 하다 보면 ‘무슨 근거로 찍느냐’고 항의하면서 카메라를 빼앗아가는 시위 참여자도 나온다”며 “경찰 채증에 대해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법령을 만들면 현장에서 불필요한 충돌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외부 전문가 참여 권고에 경찰은 난색

경찰청은 채증 개선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찬반 의견이 팽팽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4년 경찰 채증 자료에 대한 보관 및 관리에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방안을 권고했다. 인권위는 당시 “경찰관이 채증 사진을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게시하거나 지방경찰청이 채증 사진 전시회를 연 사례도 있다”며 “채증 자료의 수집과 사용, 보관, 폐기와 관련해 객관성과 투명성을 높일 수 있도록 외부전문가 참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이에 대해 난색을 보이고 있다. 채증 담당부서인 경찰청 정보1과 관계자는 “채증 자료 관리 시에 외부 전문가를 투입하는 방안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채증 자료는 사실상 수사자료기 때문에 외부인과 공유하는 것 자체가 실정법 위반”이라고 반박했다.

채증 요원 노출 여부도 논란

집회 시위 현장에서 채증 요원의 제복 착용 여부를 놓고도 의견이 갈린다. 현재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사복 경찰에 의한 채증을 막을 근거가 없다. 2015년 집회 현장에서 채증 담당 경찰관이 언론사 사진기자를 사칭해 구은수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사과하기도 했다. 다만 경찰관이 제복 상의에 부착해 사용하는 초소형 영상녹화장치 ‘폴리스캠’의 경우에는 ‘웨어러블(착용형 기기) 폴리스캠 시스템 운영규칙’에 따라 근무복 이외의 복장으로 사용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집회·시위 현장에서도 당사자가 채증 여부를 인식할 수 있도록 제복이나 인식표 등을 착용한 경찰관에 한해 채증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그러나 채증 요원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되면 폭력 집회 참가자에게 곧바로 노출될 위험성이 있다는 반론도 있다. 기동대에서 2년간 근무하며 집회·시위 현장에 자주 출동한 한 경찰관은 “채증 활동 규칙상 채증 요원이 3인1조를 구성하도록 하고 있지만 인력 수급에 따라 유동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며 “채증 요원이 과격 시위대에 둘러싸이기라도 하면 심각한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찰청이 집회 참여자의 인권을 보호하면서도 경찰관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채증 개선안을 내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새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겉으로만 인권경찰을 표방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피하려면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채증 개선 방안부터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채증(採證)

경찰이 각종 집회·시위 및 치안현장에서 촬영, 녹화 또는 녹음으로 증거자료를 확보하는 활동을 말한다.

구은서/이현진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