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노벨상 메이커' 이휘소
‘신(神)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 입자’에 이름을 붙인 학자, 20세기 입자물리학의 새 역사를 쓴 ‘게이지 이론’의 대가, 가장 유력한 노벨물리학상 수상 후보로 꼽힌 한국인, 한 번 앉으면 엉덩이를 떼지 않아 ‘팬티가 썩은 사람’으로 불린 괴짜, 점심 먹다 연구실로 사라져 앉은 자리에서 이틀 만에 논문을 완성한 천재 과학자….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휘소(李輝昭)는 전쟁통에 마산 부산을 떠돌다 검정고시로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들어갔다. 물리학에 흥미를 느껴 과를 옮기려 했으나 허용되지 않자 주한미군 부인회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25세에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30세에 정교수가 됐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양전닝 교수와 공동 연구, 페르미연구소 이론물리학부장, 시카고대 교수,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이름을 날리다 42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에 공헌한 ‘노벨상 메이커’였다. 1979년 노벨물리학상 공동수상자인 압두스 살람은 수상 연설에서 “현대 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그 천재의 자리에 내가 있다”며 그의 학문적 도움에 감사했다. 1976년 ‘참(charm) 입자’ 질량을 계산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버턴 리히터와 새뮤얼 팅의 이론적 기틀을 닦아준 사람도 그였다.

그의 최대 업적인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도 다른 학자들의 노벨상 수상에 지렛대 역할을 했다. 게이지 이론은 물질을 이루는 기본 입자 렙톤(lepton)과 쿼크(quark)가 어떻게 힘을 받는지를 기술한 것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1972) 실험으로 입증됐다. 그는 1999년 노벨상을 받은 헤라르뒤스 토프트와 마르티뉘스 펠트만에게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그들의 논문을 쉽게 풀어 써 상을 받도록 도왔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공동수상자에 포함됐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평가다.

그는 평생 연구실과 집만 오간 ‘공부 중독자’였다. 옷 갈아입는 시간도 아까워했다. 잡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유일하게 탐닉한 것은 담배였다. 못 말리는 골초여서 파이프 담배를 늘 물고 다녔다. 심지어 교회 목사의 만찬에 초대받아 갔을 때 기도가 시작되자마자 담배를 피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성향 때문인지 헛소문도 따랐다. 그의 죽음이 ‘한국의 핵 개발을 막으려는 미국의 음모’라는 내용의 소설까지 나왔다. 물론 허구였다.

그의 40주기를 맞아 이휘소 평전(사이언스북스)이 재출간됐다. 그의 제자 강주상 전 고려대 교수가 스승의 편지 등을 토대로 복원한 일대기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