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법관 대표 100명이 19일 경기 고양 사법연수원에 모인다. 2009년 4월 신영철 대법관이 촛불집회 재판에 개입했다는 논란으로 전국법관워크숍이 열린 지 8년여 만이다. 독립성과 소극성이 덕목인 법관들의 집단행동은 이례적인 일로, 한국 사법 역사상 세 번째다. 이번 회의는 이른바 ‘진보’ 판사들의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주도하고 있다. 조직화된 소수의 진보 판사들이 사법부 여론을 과대 대표하고, 영향력 확대에 치중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진보 판사 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

법관대표회의 개최는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진보 판사 목소리가 부쩍 커졌음을 보여준다. 사법 개혁을 주제로 법원의 관료화, 대법원장에 집중된 인사권 등의 문제가 논의될 예정이다. 전국법관대표회의 상설화도 추진될 전망이다. 이럴 경우 자칫 판사노조로 변질될 것이란 우려가 만만찮다. 정치권과의 연계설도 제기되고 있어 재판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진보 판사들은 주로 법원 내 학술 모임을 통해 지지세를 넓히고 있다. 대표회의를 주도하는 국제인권법연구회는 회원 480명의 법원 내 최대 모임이다. 전국 판사 3000여 명의 16% 선이다. 핵심 멤버는 2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영향력은 막강하다.

현재 대법원에 등록된 학술모임은 15개다. 노동법연구회, 젠더법연구회, 언론법연구회 등도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판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법관들은 연구회는 물론 내부 게시판인 코트넷에서도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법원 내 여론 형성을 주도하게 된다”고 전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법관들은 판결에 대한 선입견이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념 성향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우리법연구회 출신 파워도 여전

법원 개혁의 중심에 선 국제인권법연구회는 진보 판사들의 대표 모임이던 ‘우리법연구회’의 후신 격이다. 한때 150명에 달한 우리법연구회는 2010년 회원 60명을 공개한 이후 탈퇴자가 잇따르면서 해산했다. 해산 이듬해인 2011년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출범했다. 우리법연구회 회장 출신 김명수 춘천지법원장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국제인권법연구회 멤버들도 우리법연구회 못지않은 소신 판결로 주목받는다. 전국법관대표회의 회의준비지원단장을 맡고 있는 김영식 부장판사는 작년 10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첫 무죄 판결을 내렸다. 칼럼에 ‘이명박 개××’라고 쓴 온라인매체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일부 판결은 일반인의 법감정에 배치된다는 지적이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창립 멤버인 이동연 부장판사는 2010년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의 이른바 ‘공중부양’ 사건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은 2심에서 유죄로 뒤집히고 대법원이 벌금형을 확정했다.

해산된 우리법연구회 출신들도 여전히 사법 개혁의 핵심 축이다. 지난 3월 판사 성향을 분류한 ‘판사 블랙리스트’ 논란을 공론화한 서울중앙지법 최기상 부장판사와 서삼희 판사는 우리법연구회 마지막 멤버들이다. 이 연구회 출신 송오섭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사법행정위원회 위원을 판사들이 직접 선출하자’는 취지의 글을 작년 2월 코트넷에 올려 파장을 불렀다. ‘좌클릭’ 경향도 목격된다. 변민선 부장판사는 전두환 정권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은 김모씨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보수 성향 모임으로는 민사판례연구회가 있다. 민사판례연구회는 엘리트 판사들의 폐쇄적 모임이라는 일각의 지적에 따라 2010년 변호사 교수 등에게도 문호를 열었다. 개방된 조직으로 바뀐 만큼 조직적 영향력은 크게 약화됐다.

이상엽 기자 l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