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사드 보복보다 무서운 것
한국 전역에서 1만원에 팔리는 제품 A가 있다고 치자. 경기 파주 테크노밸리의 한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이 A보다 약간 뛰어난 성능을 지닌 제품을 같은 원가에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런데 A는 한국에서 한 해 대략 10만 개가 팔린다. 이 스타트업 경영자는 새로운 개선 방안을 현물로 만들어낼 때의 비용과 이 현물로 얻게 될 수익을 비교할 것이다. 완벽하게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 쳐도 본래 파이가 작은 시장이었다면 이 ‘작은 혁신’은 현실화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A가 한 해 100만 개 팔리는 시장이라면 어떻게 될까. 작은 혁신에서 기대할 수 있는 성공보수는 훨씬 커지는 반면 생산 비용은 규모의 경제 덕택에 줄어든다. 이 후발주자는 신제품을 내놓을 공산이 크다. 순전히 시장 사이즈 효과다. 시장을 흔들 정도의 성공 신화가 쓰인다면 더 많은 스타트업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뛰어들 것이고 시장은 어느덧 혁신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게 된다.

위의 설정은 불행하게도 정확히 한국과 중국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기업인들은 아직도 중국산이라면 ‘싸구려’ ‘모조품’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복제품 산자이(山寨)의 메카였던 광둥성 선전의 화창베이(華强北) 거리는 요즘 문을 닫는 가게가 속출하고 있다. 싸구려 모조품을 팔아 임차료 내기도 쉽지 않은 탓이다. 선전은 어느덧 글로벌 기업들도 인정하는 중국 최대 ‘혁신 마당’이 됐다.

세계에 28개 연구소를 운영 중인 ‘도무지 중국 기업답지 않은’ 화웨이, 중국 최대 스마트폰 기업 부부가오(步步高), 세계 최대 전기차 업체 BYD, 드론(무인항공기) 시장을 개척한 다장커지 등이 모두 선전에 둥지를 틀었다. 8억 명의 이용자 기반 위에서 갖가지 인터넷 융합을 실험하고 있는 정보기술(IT) 공룡 텅쉰도 선전에 본사가 있다. 지난해 한국에 ‘대륙의 실수’ 신드롬을 일으킨 샤오미도 본사는 베이징이지만 외주 생산은 선전에 맡긴다.

이들 기업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처럼 혁신의 아이콘으로 부상하며 사세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연구개발로 승부를 보겠다는 ‘혁신 DNA’와 연구개발 성과를 단기간에 보상해줄 수 있는 큰 시장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은 수천 년에 걸친 지방 이기주의가 여전해 파편화한 특징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물류 유통의 부담이 크게 줄어드는 정보통신기술(ICT) 영역에서는 전국형 시장이 조기 출현할 수 있었고 4G(4세대) 통신의 등장으로 이 같은 흐름은 더욱 빨라졌다. 2010년 탄생한 샤오미가 불과 4년 만에 중국 최대 스마트폰 기업으로 일시나마 등극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흐름을 탄 비즈니스 모델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은 이제 글로벌 혁신기업들이 자신의 구상을 현실화하는 테스트베드(test bed)로까지 떠올랐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최근 뒤늦게 “중국은 더 이상 짝퉁 천국이 아니다”고 공식 인정한 것을 한국 기업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의 초고속인터넷 서비스는 세계적인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인터넷 기반의 사업모델과 융합 서비스는 중국이 한 수 위다. 네트워크 효과, 즉 앞서 말한 시장의 힘이다. 더욱이 한국은 혁신적 아이디어를 비즈니스 모델에 적용하기엔 기존 시장질서가 분배해 놓은 기득권의 저항이 여전히 강고하다.

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한국의 중국사업은 여러모로 타격을 입고 있다. 하지만 사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중국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는 혁신 열기다.

박래정 < 베이징LG경제연구소 수석대표 ecopark@lgeri.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