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8일 개막하는 무용극 ‘리진’에서 리진 역을 맡은 이요음(오른쪽)과 플랑시 역의 조용진.
오는 28일 개막하는 무용극 ‘리진’에서 리진 역을 맡은 이요음(오른쪽)과 플랑시 역의 조용진.
조선의 궁중 무희로 분한 두 여자 무용수가 사뿐하게 무대를 가르며 길고 가는 팔로 우아한 춤사위를 펼쳤다. 순수한 사랑을 믿고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여인 ‘리진’, 리진과 둘도 없는 친구이지만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선택도 불사하는 ‘도화’다. 둘 사이 비극의 씨앗이 싹트기 전, 둘은 맑은 소리로 가득찬 음악을 배경으로 서로를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봤다.

이내 ‘둥 둥 둥’ 하는 음악이 깔리더니 군무(群舞) 무용수들이 등장해 역동적인 춤을 춘다. 긴장도를 높여가며 휘몰아치는 장단에 “어이!” “허!” 하는 추임새가 터져나왔다. 무대의 에너지가 한껏 고조됐을 때 리진과 도화는 서로를 간절히 희구하듯 다가가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멀어졌다. 우정에서 애증으로 치닫는 둘의 위태로운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몸짓이다.

21일 서울 장충동 국립무용단 연습실.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리진’의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었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김상덕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이 직접 안무를 맡은 첫 작품이다. 국립무용단의 무용극으로는 ‘그대, 논개여’(2012) 이후 5년 만이다.

리진은 1890년대 초 조선 주재 프랑스 공사 이폴리트 프랑댕이 쓴 조선 견문록 ‘앙 코레’(1905)에 언급된 인물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초대 프랑스 공사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는 궁중 무희 리진에게 한눈에 반해 프랑스 파리로 돌아갈 때 리진을 데려갔다. 하지만 리진은 프랑스에 잘 적응하지 못해 조선으로 돌아왔다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다.

김 감독은 프랑댕이 남긴 리진에 대한 단서에 예술적 상상력을 가미해 새 작품을 제작했다. 깊은 우정을 나눴지만 리진에게 질투를 품고 권력에 대한 욕망을 키운 도화, 궁중 예술가들의 지배자로 리진과 플랑시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원우 등 가상의 인물을 더했다.

극은 조선시대 궁궐과 프랑스 파리를 오가며 펼쳐지고 리진과 도화의 우정, 리진과 플랑시의 사랑, 원우의 리진에 대한 지배욕 등이 입체적으로 더해졌다.

리진과 도화 역을 번갈아 연기하는 이의영·장윤나와 이요음·박혜지가 우아하고도 치명적인 춤사위로 극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황용천·조용진이 플랑시 역을, 송설이 원우 역을 맡아 연기한다.

김 감독은 ‘리진’을 통해 무용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전통춤을 재료로 하지만 세련미와 동시대성을 갖췄다”며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작품으로 만들어 무용극은 고루하다는 편견을 깨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다”고 했다.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