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집단 우울증의 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으로 시작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1948년 제정 당시부터 헌법을 장식해왔다. ‘5·16 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가 들어간 것은 1962년 개정 때였다. ‘유구한 민족사, 빛나는 문화, 그리고 평화에의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대한민국은~’은 1972년 유신헌법 개정 때였다. 지금의 헌법 전문은 9차 개정, 즉 6월 항쟁의 결과로 만들어졌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다음 헌법 개정 때는 5·18과 촛불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헌법 전문은 우스꽝스럽고, 시대착오적인 ‘국민과 민족에 대한 국가의 지시와 명령’을 포함하고 있어 문제적일 수도 있다. 민족을 낙원의 피안으로 인도해간다는 식의, 그래서 ‘민족중흥의 사명’과 별다를 것도 없는 진로를 제안하고 있다. 헌법을 일종의 민족 기억과 진로 프로그램으로 인식한 결과 국민 행복과 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중소기업 보호, 농어민 보호 등 온갖 국가의 의무가 덕지덕지 나열되는 헌법 타락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헌법은 불가피하게 시대정신의 일부를 반영한다 하겠지만 우리 헌법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헌법이 묘사하는 대한민국은 저항하고, 투쟁하며, 분열하고, 들끓는 그런 갈등국가요 부패국가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법통을 3·1운동으로 끌어올려 과장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제헌 헌법 당시의 정치 갈등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불의에 항거한 4·19를 필두로 ‘민주개혁과 민족의 단결’, ‘사회적 폐습과 불의의 타파’를 헌법 전문에 포함한 것은 역설적으로 ‘문제적 대한민국’이라는 부정적 사고에 기반을 둔 부정의 증후군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여기에 5·18과 6월 항쟁, 촛불시위까지 포함하면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갈등과 분열, 분노와 저주, 독재와 그것에 대한 투쟁으로 일관하는 그런 나라로 완성된다. 가난과 비극 속에서 태어났으되 오늘날 세계의 무역국가로 컸고, 세계로 열린 개방국가이며, 그 국민이 지구의 거의 모든 국가에 진출해 살며, 가장 극적인 경제적 성취를 달성한, 자유롭고 위대한 대한민국은 헌법에 없다. 이는 국민의 자학이며 민족적 우울증이다.

굳이 헌법 전문에 포함돼야 할 가장 강력한 민족적 기억이라면 엊그제 67주년을 맞은 6·25다. 한국전쟁 혹은 그 무엇으로 부르든 세계적 이념 전쟁으로서의 실체는 변할 수 없다. 스탈린의 지령을 받들어 일거에 38선을 돌파했던 김일성의 이 전쟁은, 이승만과 바로 그 전쟁 덕분에 자유진영으로 재구성된 미국 등의 지원에 힘입어 완전하게 좌절됐다. 민족상잔이라는 참극을 낳았지만 바로 그 전쟁을 통해 한국인은 자유의 소중함을 비로소 알게 됐고, 사회주의 미몽에서 깨어났으며, 2차 대전 이후 대부분 후진국이 빠져들었던 전근대성의 질곡에서 깨어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길을 힘차게 걸어나갈 수 있게 됐다.

적어도 140만 명의 북한 지역 거주민이 자유를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남하해 새로운 대한민국에 가담했다(권태환 서울대 교수의 추정). 문재인 대통령의 부친도 바로 그 대열에 가담했다. 전쟁 중 소수의 몽상가들이 월북했다고 하지만 그 숫자의 열위는 비교를 불허한다. 전쟁 기간에 온 민족은 각자의 삶 전체를 판돈으로 걸고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다. 이것보다 더한 세계사적 선택이 있겠으며, 자신과 가족의 생명 전부를 알 수 없는 내일의 가능성에 걸었던, 거부와 탈출과 역사적 결심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전쟁은 가난하고 굶주리던 한국을 냉전시대 자유세계의 적자(嫡子)로 키워냈다. 운명은 그 나라의 한쪽에는 축복을, 다른 쪽에는 저주를 내렸다. 해방공간에서 흔들리던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그렇게 피를 흘리고 세계가 원호한 끝에 운명처럼, 기적처럼 형성됐다. 기억해야 할 집단기억 중 이만한 세계사적 선례가 없다. 헌법 전문을 고친다면 그 앞머리에 먼저 기록돼야 할 것은 바로 67년 전의 그 전쟁이다. 그것은 비극으로 시작됐지만 장대한 승리의 서사를 써내려 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엊그제 그 기념행사에 불참했다.

정규재 논설고문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