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혈세만 낭비한 국가브랜드 개발
박근혜 정부가 내건 ‘창조경제’ 구호가 뒷전으로 밀리더니, 이제는 국가브랜드 슬로건 ‘크리에이티브 코리아(Creative Korea)’도 쓰레기통으로 던져지게 됐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이 슬로건을 발표한 지 1년 만에 공식 폐기 선언을 했다. 표절 논란 등 이유야 어찌됐든 슬로건 개발에 들어간 국민 혈세 56억원이 증발하게 생겼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9일 이 슬로건 폐기를 발표하면서 “표절 의혹 등 여러 논란으로 국민적 공감과 신뢰를 얻지 못해 국가이미지 제고라는 정책효과를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새로운 국가브랜드 슬로건 개발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아예 선을 그었다.

그만큼 이 슬로건 개발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슬로건이 프랑스 산업브랜드 이미지 ‘크리에이티브 프랑스(Creative France)’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국정농단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 씨의 측근 차은택 씨 회사에 관련 일감이 몰렸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잡음이 그치지 않자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취임 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국가브랜드 슬로건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슬로건의 표절 여부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크리에이티브’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고 두 슬로건의 글자꼴이 다르기 때문에 표절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설령 이 말이 맞다고 해도 관련 부처의 신중하지 못한 의사결정으로 혈세를 낭비하게 됐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비슷하게 보인다면 결정 과정에서 걸러내는 게 디자인 개발의 기본이다. 슬로건에 우리 역사와 문화 등이 전혀 담기지 않아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부적합한 면도 있다.

문체부는 슬로건 개발을 1년 반 동안 추진하면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외부에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사용 문구와 디자인을 내부 논의로만 결정해 깜짝 발표하듯이 내놓았다. 비판적 목소리도 귀담아듣지 않는 모습이었다. 결국 문체부도 슬로건 개발을 둘러싼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국가브랜드나 슬로건은 잘만 만들면 국가의 격과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폐기 선언에서만 멈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양병훈 문화부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