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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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우려가 적지 않았다. 북핵 해법과 관련해 대화에 방점을 둔 문 대통령과 제재와 압박을 강조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이에 엇박자가 크게 나지 않을까 해서였다. 동맹국끼리 손발이 안 맞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이 그런 신호를 악용하면 어떻게 될까.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77)를 만난 건 그래서였다. 한 교수는 1993~1994년 김영삼(YS) 정부의 첫 외무부 장관, 2003~2005년 노무현 정부의 첫 주미대사로 각각 22개월을 일하며 1, 2차 북핵 위기 대처에 깊이 관여했다. 1차 북핵 위기 땐 미국 내에 북한을 폭격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비등했다. 이후 북핵 협상에서 미국이 북한에 너무 끌려다닌다는 YS의 강경한 태도와 빌 클린턴 행정부의 유화적 태도 사이에서 고심해야 했다. 주미대사 땐 햇볕정책을 계승한 노무현 정부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간극을 메워야 했다.

지난 4일 서울 경희궁 옆 아산정책연구원에서 한 교수를 만나 한·미 정상회담과 북한 핵·미사일 도발 등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공교롭게 북한은 이날 오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해 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핵·미사일 동결을 전제로 한 문 대통령의 대화 제의가 무색해졌다.

▷한·미 정상회담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전반적으로 잘된 회담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이나 의전 면에서 실책이 없었고, 우리 대통령의 발언이나 의사가 적절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됐다고 봅니다. 두 정상 간의 이해도를 높이고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신뢰를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새 정부 출범 후 사드 배치 등을 놓고 한·미 간에 이상 기류가 감지되는 듯했습니다만, 이번 정상회담으로 한·미동맹이 정상적으로 회복됐다고 볼 수 있을까요.

“양국 정부나 정상 간의 입장 차이가 잘 조정되고 혹시 있을지 모를 오해도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습니다. 대북 정책, 방어 태세, 동맹 운영 면에서 양국이 호흡을 맞춰 협조해나갈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상 기류가 있었다면 주로 사드 배치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미국 방문 중 우리 대통령이 미국을 안심시키는 발언을 한 것이 정상화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봐야죠.”

▷한국이 북핵협상의 주도권을 어느 정도 행사할 수 있을까요.

“주도권이란 주로 정치적 수사(修辭)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실제로 방향 설정이나 정책 결정의 지침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대북 정책은 한·미 양국이 서로 논의, 협의, 공조한 결과물이지 어느 한쪽이 결정하고 다른 쪽이 따라가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거든요.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협의는 협상이 되기도 하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브레인스토밍이 되기도 합니다.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한다’는 표현 자체가 적절치 않아요. 미국이 한국의 의견과 이해관계에 더 많은 관심과 무게를 두고 존중하겠다는 정도로 보이는데,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대통령이 방미 전에 전직 외교부 장관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요, 어떤 말씀을 해줬습니까.

“너무 기대를 많이 하거나 욕심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첫 만남인 만큼 서로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관계 형성이 중요하므로 사안을 구체적으로 얘기하기보다 큰 틀에 대한 포괄적 논의와 합의가 낫다고 했습니다.”

▷두 정상은 북한과의 대화 재개 조건으로 ‘올바른 여건’을 들었는데, 양국 간에 이견이 없을까요.

“‘올바른 여건’이 돼야 대화할 수 있다는 데에는 한국도 같은 의견이어서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겁니다. 다만 ‘올바른 여건’이 뭐냐에 대한 의견 차이는 있을 수 있겠죠. 한국은 조금 너그러울 것이고, 미국은 조금 까다로울 것이고요.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에 능한 만큼 전제조건에 관해서는 융통성이 있을 겁니다. 따라서 한·미 간에 큰 의견 차이는 없으리라 봅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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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은 북한의 핵 동결을 대화의 재개 요건으로 제시했습니다. 북한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미국은 과거처럼 북한의 핵 동결과 그에 대한 보상을 반복하는 패턴에 대해 ‘같은 말을 두 번 살 수는 없다’는 입장인데요.

“미국은 새로운 말이면 다시 살 수 있고 좋은 행동이면 보상할 수 있다고 협상을 합리화할 수 있을 겁니다. 과거 부시 대통령 2기 때에도 그런 명분으로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라는 ‘새로운 말’을 사주고 북한과 협상해 1995년 9월 합의를 이끌어낸 적이 있습니다. 결국 요점은 양측이 서로의 체면을 살리면서 협상에 응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터뷰하는 도중 ICBM 발사에 성공했다는 북한의 ‘중대 발표’가 전해졌다. 한반도 정세가 더욱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치닫는 형국이다. 인터뷰 후 이메일로 추가 질문을 보내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는 북한의 ICBM 발사 성공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미국은 북한에 군사력 사용 가능성을 연일 시사하고 있습니다. 선제 타격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을까요.

“미국이 말하는 ‘모든 옵션’이란 군사 공격은 물론 협상도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미국의 선제 공격은 현재로선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북한의 ICBM이 확인되고 위험이 임박해질 때 미국이 심각하게 고려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미국 본토에 대한 핵 공격 가능성이 가시화된다거나 북한이 직접적인 위협을 자행할 때, 주한 미군이 철수하거나 축소됐을 때 무력 공격의 개연성은 더 커지겠죠.”

▷미국 본토가 위협의 대상인 된 만큼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에 나설 수도 있을까요.

“미국의 최대 관심사가 ICBM이므로 그것과 관련한 약간의 미끼를 북한에 제공할지도 모르죠. ICBM에 관해 협상을 하자는 식으로 말이죠.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로선 미국을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요. 북한도 그런 카드를 역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북한이 한국은 제쳐두고 미국하고만 협상하려 들 가능성이 더 커지겠습니다.

“북한은 늘 그런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1993년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시작된 북핵 위기가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북한은 핵 무장을 해야만 정권을 보존하고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핵무기는 북한을 고립시키고 경제 파탄을 불러와 인민을 도탄에 빠뜨립니다. 미국 일본 등 주변국의 군사적 대응 능력도 그에 따라 커지고 있고요. 어떤 경우든 북핵 문제는 압력과 설득, 안전 보장, 협상 등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해 비핵화로 가도록 강구해야 합니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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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상회담에서 ‘사드’는 정식 의제로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두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북한의 핵미사일을 방어하고 탐지, 교란, 파괴하는 능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는 바로 사드가 할 수 있는 일을 지칭하는 겁니다. 사드를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 사드 활용에 양국이 합의한 것을 명시했다고 봐야 합니다.”

▷미국은 무역 중단까지 거론하며 대중(對中) 압박을 강화하고 있지만 중국은 사드 배치에 여전히 강경합니다. 독일에서 열리고 있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진전이 있을까요.

“한국과 미국이 무슨 말을 하든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사드 배치를 양해하거나 반대 입장을 거둬들이지 않을 겁니다. 김정은이 얼마나 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느냐, 미국이 경제협력 등 다른 이슈에 얼마나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중국이 한국에 대한 압박을 재고하는 조짐이 감지되는 만큼 한국과 미국은 사드가 중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북한 핵이 여러 면에서 중국에 어떤 불이익을 가져오는가를 납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한·미 정상회담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한·미 공동성명의 전체적 맥락을 보면 중국으로선 한국이 미국에 편향됐다고 해석할 만합니다. 중국은 한국이 대미, 대중 관계에서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보다 좀 더 균형을 이룰 것으로 기대했을 겁니다. 친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중국 쪽으로 이동하지 않을까 기대했을 텐데 그런 사인이 전혀 없었죠. 그래서 중국이 즐거운 심정은 아닐 겁니다. 중국의 오해와 불필요한 우려를 해소하도록 상당히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식 의제에도 없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을 거듭 주장했습니다.

“트럼프가 원하는 것은 재협상이라기보다 수정이나 조정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재협상은 기존 협정을 파기하고 새로운 협정을 맺는다는 건데 이런 것과는 거리가 있어요. 영어로도 ‘renegotiation’이 아니라 개선을 뜻하는 ‘improvement’라고 했거든요. 트럼프로선 공약을 했으므로 국내 지지층을 설득하기 위해 뭔가 내세울 게 있어야 할 겁니다. 따라서 트럼프의 체면과 정치적 입장을 살려주면서 손질하는 수준이 될 거라고 봅니다.”

"대북 강경파-온건파 온도차 커…대통령이 직접 '빅 텐트' 쳐야"
유인책으로 사용한 '햇볕정책', 과도한 몰입으로 핵위기 키워
개성공단 폐쇄는 불가피한 선택…경협은 하되, 발 뺄 상황 염두를

회고록 '외교의 길' 낸 한승주
트럼프 '방위비 재협상' 왜?…분담금은 5년마다 재협상하는 것
한반도 위기 고조로 미국 비용 증가…양국 동맹에 영향 없게 협상해야

[人사이드 인터뷰] 김영삼·노무현 정부 외무장관·주미대사 지낸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은 왜 자꾸 요구할까요.

“그건 다른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됐어도 요구했을 겁니다. 2014년 타결된 제9차 방위비 분담특별협정(SMA)은 내년까지 적용되므로 재협상해야 하니까요. 지난번에도 꽤 증액됐죠. 트럼프는 좀 더 큰 요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걸로 한·미동맹이나 주한미군 주둔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닐 겁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한국의 분담금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적지 않다고 정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율로 봐서는 유럽 일본보다 우리가 더 분담하고 있죠. 미국은 정부 예산이 압박을 받으니까 가급적 주둔국의 분담금을 늘리려는 처지이고요. 분담금은 계산 방법이나 분담 비율에 따라 달라집니다.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면서 미국의 핵잠수함, 항공모함,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F35 등 전략자산을 한 번 전개하는 데도 굉장한 비용이 들거든요. 미국으로선 전체 비용이 늘었고, 주둔국의 부담 능력이 커진 만큼 더 분담하라고 할 필요성을 느끼는 거죠. 다행히 아직은 전략자산 전개나 억지력 비용 같은 걸 계산에 넣지 않고 있지만 말입니다. 한·미동맹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협상하고 서로 양보해 원만한 합의에 도달해야 합니다.”

한 교수는 지난 5월 학자로서, 외교 책임자로서, 민간 외교가로서 활동한 그간의 경험을 담은 회고록 《평화를 향한 여정-외교의 길》(올림)을 펴냈다. 학창 시절과 미국 유학 시절은 물론 외무부 장관, 주미대사 때 북핵 위기를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분투한 과정과 그 어느 때보다 큰 위기와 도전에 직면한 한국 외교가 나아갈 길 등을 제시했다.

▷대북 정책과 관련해 한·미 정상의 강온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장관과 주미대사를 역임하셨습니다. 지금의 상황도 그때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한·미 양국에서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정책 경쟁이나 분투가 현저하게 눈에 띄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단계에서 정책의 온도 차이가 드러날 수 있겠죠. 결국 그런 정책적 간극을 완화하고 효과적이고 단일화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최고 정책결정권자인 대통령입니다. 어떤 정책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유지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이념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잘 판단해 정책을 수립하고 이행해야 합니다.”

▷과거 햇볕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볼 때 햇볕정책은 유인책으로 북한의 체제와 정책을 바꾸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햇볕정책으로의 과도한 몰입은 북한에 대량살상 무기를 개발하는 재원을 제공하고 우리 국민이 인질이 되는 위험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분단 시절 서독은 동독에 차관을 제공하면서도 ‘가역적인(돌이킬 수 있는)’ 정도의 거래와 협력만 했어요. 최악의 경우 돈은 떼일 수 있지만 인질은 허용하지 않는 정책을 고수했죠. 우리도 경제협력은 시도하되 한 번 내민 발을 거둬들일 수 없을 정도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남북 경제협력이 불가역적인 경우가 있었습니까.

“개성공단이 그런 사례죠. 취지는 좋지만 너무 깊숙이 발을 들이면 북한 같은 정권을 상대할 때 위험요소가 많아지니까요. 경제적으로는 북측이 합의를 지키지 않거나 합의 내용과 다른 행위를 했을 때 우리가 뒷걸음질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다행히 그런 사태까진 생기지 않았지만 자칫 우리 인원들이 인질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경수로발전소를 지어주려던 사업도 가져갔던 장비를 다 빼앗긴 채 중단됐습니다. 개성공단은 북한의 체제 변화에 대한 기대가 있어서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우리의 개입과 투자 정도가 너무 컸다고 봅니다.”

한승주 교수는 개성공단 가동 중단을 비판하는 데 대해서는 “(가동 중단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반박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천안함 사건에도 불구하고 개성공단을 폐쇄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때문에 가동을 중단했다. 한 교수는 “그렇지 않았으면 어떤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지 장담할 수 없다”며 “그 후엔 북한이 더 요란하게 핵실험에, 수소폭탄 실험까지 했으므로 어느 단계에서인가는 폐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 지푸라기 하나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경기고 1학년 때인 1956년 미국으로 국제여름캠프를 떠나기 전 서울 여의도공항에서 가족들과 찍은 사진.
경기고 1학년 때인 1956년 미국으로 국제여름캠프를 떠나기 전 서울 여의도공항에서 가족들과 찍은 사진.
▷북핵 문제로 한반도에 무력 충돌 위기가 고조됐을 때 이를 막아야 하는 책임자로서 심정이 어땠습니까.

“물론 걱정이 많았죠. 그걸 막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물론 중국의 협조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엔 모두 무력 충돌을 우려하고 그걸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이제 와서는 ‘그때 북을 공격했으면 지금의 문제는 없었을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그때 무력 충돌이 있었다면 그 피해는 모조리 우리 민족, 특히 한국 국민의 몫이었을 겁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참모진 중 ‘민족주의적’ 경향을 지닌 사람들을 워싱턴에서는 ‘한국의 탈레반’이라고도 불렀다는데, 현 정부에서도 자주파와 동맹파의 갈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향으로 볼 때 ‘자주파’에 가까운 사람, ‘동맹파’에 가까운 사람이 있겠지만 그동안 학습효과와 성숙할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의견과 힘을 결합시키고 결집시키는 것이 유능한 리더십의 몫이겠죠.”

▷회고록을 보니 노무현 대통령에게 좌우를 아우르는 ‘빅 텐트’를 치라고 건의했다고 했는데 지금 정부에도 해당되는 말씀인가요.

“정책 면에서 이념적으로 편향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각료 인선도 이념적 성향에 상관없이 능력과 정책에 따라 균형있는 사람들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정치적으로 여야가 서로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는 것이 국가 전체를 위하는 길이니까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역량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장관의 기능이나 비중은 대통령이 어떤 정책팀을 만들어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강 장관은 다자외교 전문가지만 양자외교, 북핵 외교 등도 잘 수행할 겁니다. 외교부 유엔국장 시절엔 대(對)유엔 외교를 잘했고, 유엔에 가서도 능력을 인정받았고요. 국제적으로도 세계의 지도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잘할 겁니다.”

▷문 대통령은 외교부의 ‘순혈주의’를 비판하면서 강 장관에게 조직 개혁을 주문했습니다.

“순혈주의란 언론이 붙인 것이지 실재하지 않는 명칭이라고 생각해요. 외무고시나 직업 외교관 출신이 아닌 저도 대과 없이 장관이나 주미 대사직을 수행했는데, 외교부 관료들이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이기적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이 있으면 상당히 잘 협조하고 단합해줬죠. 텃세가 강하거나 배타적이라고 느끼진 않았어요. 좋은 의미의 조직 개혁은 필요하고 당연하지만 모든 제도와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통념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일하다 보면 알게 되겠죠.”

일본은 북한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다루기 어려운 상대다. 한·일 관계에 대해 한 교수는 “양국의 국수 세력이 서로를 자극하는 행동과 언사로 서로의 입지와 행동 영역을 넓혀주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양국의 불화를 자극하는 악순환을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또 “누군가가 그런 악순환을 깨뜨려야 하는데 그러자면 계몽된 사고와 용기있는 행동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 일본과 계속 싸우면서 악감정을 갖고 살 것인지 생각해봐야 해요. 언제까지나 과거에 매달려 있을 것인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위안부 관련 합의의 폐기나 재협상에 매달려 있는 동안 세계는 앞으로 움직여나갈 겁니다. 북한 핵 문제, 경제 문제, 주변국 문제 등에서 한·일 간 협력의 필요성도 더욱 커질 것이고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 한승주 교수의 실용주의 외교론
'고차방정식' 다자외교…우방에 대한 '거짓없는 신뢰'로 풀어야

1994년 한승주 외무부 장관(맨 왼쪽)이 윌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오른쪽 두 번째)과 북핵 관련 정책협의를 하고 있다.
1994년 한승주 외무부 장관(맨 왼쪽)이 윌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오른쪽 두 번째)과 북핵 관련 정책협의를 하고 있다.
“1993년 북핵 문제가 터졌을 때였습니다. 가장 큰 우려는 미국이 과잉대응해 북한을 무력으로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내 정치권과 언론은 이를 막아야 한다고 주문했지만 막상 협상 국면에 들어가자 대통령을 포함한 국내 정치세력은 미국이 북한에 너무 유화적으로 대응한다고 걱정과 불만을 표시했죠. 이처럼 이중적 요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북핵 문제는 반드시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믿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비난도 무릅쓰기로 각오했죠.”

외교를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가 실용주의 외교를 강조하는 이유다. 외교적 협상이란 고차방정식으로도 풀기 어려울 만큼 복잡할 때가 많다. 따라서 주변 요인에 휘둘리지 말고 현안의 실질적인 결과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안보를 위해서는 진영이나 노선을 떠나 무엇이 우리의 생존에 가장 도움이 되느냐를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우리 속담에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검거나 희거나 고양이가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했죠. 실용주의라고 해서 원칙이 없거나 목적을 위해 수단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정책 목표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사용하되 이념, 감정, 정치적 이해관계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 실용주의 외교입니다.”

북한의 핵 무장, 미국의 자국중심주의, 주변국의 대국주의, 갈등하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의 줄다리기 등 여러 가지 위기와 도전에 직면한 한국 외교가 제대로 길을 찾으려면 실용주의에 기반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양자 또는 다자의 이해가 상충하는 가운데 갈등을 조정하고 협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교수는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몇 가지 원칙이 있다”며 상대방에게 거짓이나 근거없는 얘기를 하지 말 것, 우방에 사전에 통고하지 않았거나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를 주지 말 것, 가급적 상대방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행동할 것 등을 강조했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