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젊은이들과 소통하려면 신조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처음 들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는 용어도 있지만 젊은 학생들과 지내다 보니 금방 감이 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최근 접한 ‘탕진잼’이란 용어는 금방 다가오지 않았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적은 돈을 쓰면서 당장의 만족감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젊은이들 사이에는 상당히 공감을 얻는 소비 트렌드라고 한다. ‘이생망’이나 ‘헬조선’만큼은 아니나 두 자릿수 청년실업률 시대의 불안과 미래에 대한 체념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새 정부 들어 국민의 눈높이에서 아픈 자리를 치유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광경이 자주 연출돼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넘친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80%를 웃도는 것은 새 정부 정책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일자리위원회’를 신설하고 대통령 자신이 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총력을 기울이는 일자리 문제다. 그러나 5월 말 ‘일자리 100일 계획’이 발표됐지만 세부 정책 수립은 늦어지고 있다. 당선 직후 ‘재벌개혁’과 ‘중소벤처기업 육성’이 중요 경제정책 기조인 듯했는데 대통령의 인천공항공사 방문 이후 ‘비정규직 제로’ 정책과 ‘최저임금 1만원’ 정책에 사회적 관심이 더 쏠리면서 중소기업과 영세 소상공인으로 관심사가 옮겨졌다. 소득 불평등의 원인이라던 대기업 관련 정책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숫자놀음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최저임금 인상과 관련해 영세 자영업자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도 진통을 겪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 등 일부 법을 개정해야 하는 과제들은 중장기로 넘어가야 해서 실행에 의문이 들고 있다.

이런 혼란은 문재인 정부의 태생적 특수성 때문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5개년 계획과 100대 국정과제를 아직 공개하지 않는 가운데 일부 각론이 판을 치고 있다. 정책 총론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각론을 정하기는 어렵다. 정책목표 설정 시 가치관을 분명히 해야 추진 과정에서 동력을 얻는다. 문재인 정부뿐 아니라 과거 정부들도 같은 정책 실패를 되풀이했다. 출범한 지 두 달밖에 안 된 정부에 실패 운운해선 안 되지만 국민의 기대와 희망이 우려로 바뀌면 안 되지 않은가.

문재인 정부가 선언한 ‘탈(脫)원전’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처럼 내용에만 집중해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정책결정 과정을 등한시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예다. 국민 욕구의 정확한 파악과 이를 정책화하는 체계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은 미시정책들이 앞서 나가고 있다. 정책 간, 정부부처 간 정책의 일관성 결여도 고질병인데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정보통신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으로 전 세계 인적·물적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줄어들고 있는 변화를 직시해야 한다. 세계경제가 반(反)세계화와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하고 있다지만 오히려 국경 장벽이 낮아지고 개인, 기업, 정부 등 주요 경제주체들이 밀접하게 연결돼 가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로 무장한 기계들이 등장,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던 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과거 정권에서 좁은 시야와 임시변통으로 세운 정책 실패가 넘쳐나는 상황이다. 청년실업, 부동산 투기, 저출산·고령화, 양극화, 교육개혁, 구조조정, 연금, 복지 등 핵심적인 정책에서 깊은 성찰과 반성이 없으면 정책 실패는 더 늘어날 것이다.

한국 경제는 요소투입형 성장의 한계, 고용과 투자의 선순환구조 약화, 저출산고령화, 포퓰리즘 만연 등 현실적 제약의 덫에 갇힌 지 오래다. 우수한 인적자원,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첨단 제조업, 성장산업화한 서비스업, 동북아 가치사슬 확대 등을 위해 노력해 나가며 미래지향적이고 보편적인 성장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개별 정책을 쏟아내기에 앞서 젊은이들이 마주할 미래에 대한 발전전략을 준비하는 데 중지를 모아야 한다. ‘국민행복’ 추구 선진국인 핀란드나 스웨덴, 덴마크 같은 나라들의 예를 참조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탕진잼’에 빠지는 것은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라는 엄중한 이유가 있다.

이인실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 >